2월의 독립운동가 - 김창환, 이진산, 윤덕보, 김원식 선생
2월의 독립운동가 - 김창환, 이진산, 윤덕보, 김원식 선생
  • 전북동부보훈지청
  • 승인 2024.02.05 13:49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2월의 독립운동가 김창환, 이진산, 윤덕보, 김원식 선생

 김창환 선생은 1872년 경기도 광주에서 태어나 1899년 대한제국 육군에 입대하여 1905년까지 육군 부위로 복무하였다. 국권피탈 이후 비밀결사 단체인 신민회에 가입하여 독립운동가의 길을 걷게 된다.  

  1910년 한일합방 이후 신민회 인사들과 만주에 독립운동기지를 건설하기 위해 중국 길림성 삼원보로 이주하였으며, 1911년 조선총독이었던 데라우치 마사타케를 암살하려 했다는 소위 105인 사건에 연루되어 징역 6년을 선고받는 등 고초를 겪기도 하였다. 이후 만주로 이동하여 1913년 5월에 설립된 신흥무관학교의 교관으로 무장독립운동을 위한 간부양성에 매진했다. 

  1922년 서로군정서를 재조직하여 총지휘관으로 활동하였고, 대한통의부 의용군 사령장으로도 활동하였으며, 정의부가 조직되었을 때 재무위원을 맡았다. 1931년 일제가 만주사변을 일으켰을 때 한국독립군 부사령으로 총사령 이청천을 도와 전과를 올리기도 하였으나 일제의 지속적인 압박으로 남경으로 이주하였고, 이후 조선민족혁명당 간부로 활동하다가 1937년 2월 12일 중국 남경에서 사망하였다. 

  정부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이진산 선생은 1880년 경상북도 의성에서 태어나 1910년대 신민회 인사들이 세운 신흥무관학교를 후원하고, 1919년 4월 서간도 독립운동기관인 한족회의 법무부장으로 활동하였다. 

  1921년 상해에서 안창호·여운형 등과 함께 독립운동단체의 결집을 촉구하는 격문을 배포하였고, 1922년 국민대표회의에 서로군정서 대표로 파견되었으며, 1923년 국민대표회의가 개최되자 개조파의 일원으로 국민대표회의 특별심사위원·의정기초위원으로 활동하였다.

 1924년 8월 재무위원으로 정의부의 핵심요직을 맡으며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하였으며 1926년 12월 길림성에서 정의부, 한족노동당 등이 발기한 조선혁명자후원회의 발기인으로 참여하였다. 

정부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2014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윤덕보 선생은 1919년 3월 함경남도 홍원에서 만세시위운동에 참여하였다가 만주로 망명하여 대한독립군비단에 가입하였다. 군비단에서 재무부장으로서 활동하였고, 군비단이 1921년 흥업단 등 주변 독립운동단체들과 연합하여 대한국민단을 조직하였을 때 총무로 선임되였으며, 농민회를 조직할 때 주도적으로 참여하였다. 

  1924년 대한통의부·서로군정서 등 8개 단체 대표 25명이 참가한 가운데 길림에서 조직된 정의부에서 행정위원으로 선출되는 등 중심적인 역할을 담당하였고, 1925년 7월 국무령제 신설 시 김좌진 등과 함께 국무위원으로 임명되었다. 이후 정의부의 중앙행정위원장·외교위원장 등으로 활동하였으며, 1927년 8월에는 정의부 특별위원으로 길림성 부근에서 활동하였다. 

  정부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김원식 선생은 1889년 8월 경상북도 안동에서 태어나 1919년 안동지방에서 만세시위를 주도하다가 중국 만주지역 삼원보로 이주하였고, 그곳에서 서로군정서에 가입 후 국내로 잠입하여 군자금을 모집했다. 

  정의부가 결성되자 중앙집행위원장을 보좌해 각종 기밀과 인사에 관한 총체적인 업무를 관장하는 간정원 비서장으로 활동하였다. 1924년 한족노동당 창립대회에 발기인으로 참여하였고, 1928년 한족노동당이 재만농민동맹으로 조직 개편하자 집행위원으로 선출되었으며, 1930년 김좌진이 암살당하고 지청천 등이 북만주 위하현에서 한국독립당을 결성하자 집행위원으로 선출되었다. 

  1932년 남경에서 김상덕과 함께 김원봉을 만나 항일무장투쟁 강화 방략에 대해 논의하는 등 지속적으로 항일을 위한 독립운동에 매진하였고, 1933년 홍진과 함께 남경에서 한국혁명당 대표 윤기섭과 신한독립당을 결성하여 조직위원장으로 활동하였으며, 이후 북경에서 낙양군관학교 한인 입교생을 모집하기 위한 활동에 주력하였다. 

  정부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68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1910년 한일합방으로 일제에 의해 국권을 빼앗긴 한국인들은 독립을 열망하였다. 1919년 3.1운동은 독립의 방법에 대한 해법을 알려준 준 사건이었다. 그것은 만주지역에서의 독립운동, 그중에서도 무장을 통한 항일 독립운동이었다. 

  김창환, 이진산, 윤덕보, 김원식과 같은 사람들 역시 그 시작과 활동단체는 달랐지만 지향했던 바는 한국의 독립이었던 만큼 그 길로 가기 위한 과정으로서 탄생한 정의부에서 조국의 독립을 위한 활동에 매진하였다. 비단 이들 뿐만 아니라 당대 만주지역에서 활동했던 대부분의 독립운동가들은 오직 독립을 위해, 그 뜻을 하나로 모으기 위해 끊임없는 노력을 기울이며 그 척박한 대지에 있었던 것이다.

 
전북동부보훈지청


관련기사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