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시] 박성규 시인의 ‘허퉁한 날’
[초대시] 박성규 시인의 ‘허퉁한 날’
  • 박성규 시인
  • 승인 2024.02.01 1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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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허퉁한 날’
 

 대중을 울리고 웃기는 말 한마디가
 갈증 나는 시절에
 어쩌다 어둠 속 초록 낱말이어도 좋을까
 

 점괘처럼 선택한 앞날이 무엇을 가늠할지
 눈길 마음 따라, 그 허망을
 새롭게 그리거나 지워가도 좋을까
 

 산마다 골마다 범은 내려온다는데
 멸종을 넘은 범이 내려온다는데
 시련만은 짐승들은
 언제나 물어갈 것인가, 물어가도 좋을 것인가
 

 내 머릿속을 두드리는 쇳소리로
 받아 적다가
 가슴에 남은 몇 마디가 무색하구나
 

 앞뒤 맞지 않은 낱말 맞추기로
 날을 세우며
 한탄마저 무서워, 범이 무서워
 속살거리는 봄바람에
 날을 세운다
 

 *박성규 시인의 시집 ‘밀바의 봄노래’에서 

박성규 시인

 박성규 <시인/전북문협 회원>  

 <평설>  이 시는 시가 구비해야 할 위의(威儀)를 모두 갖추고 있다. 애매성의 정도도 과하지 않게 감추어내고 있으며, 은유의 맥락 또한 시적 흥미를 높일 만큼 단서들을 잘 정착하고 있다. 여기에 시대상의 반영에 대한 시적 화자의 진술 태도가 잘 짜인 단막극을 보고 듣는 듯하다. 한 편의 시에 이른 것을 모두 구비하기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시적 자아가 ‘허퉁한 날’이 될 수밖에 없는 원인이 이 작품의 배경을 이룬다. ‘허퉁하다’는 ‘허망하다’의 속언을 좀 더 음성영상이 센 느낌을 주는 말이다. ‘기대와 달리 보람이 없고 허무하다’는 뜻이다. 무엇이 왜 그렇게 기대와 달리 보람이 없고 허무할까? 시적 배경을 이루는 시대상과 관련이 깊다.

  2연에서 그런 맥락의 보조관념으로 “점괘를 선택한 앞날이~” 라고 진술하고 있다. 삶은 끊임없는 선택의 결과 아닌 것이 없다. 그렇지만 모든 선택이 기대를 충족시키고 희망에 응답하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선택이 쉽지 않은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는 시대상의 반영으로 읽어야 시맛이 살아날 것 같다. 시는 ‘지금+여기’의 문제에서 벗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선거-투표’의 선택의 결과가 ‘허망한 것’이라면 시인의 심정도 편치 못할 것이다.

  3연의 ‘범’은 민족의 기상을 표상하는 범이 아니라 약자를 주눅 들게하고, 가지지 못한 자를 윽박질러 겁주기도 하며, 반대자를 넉눌러 무릎 끓게 하고, 반대편을 적으로 몰아 몰살시키려 하는, 무도한 힘의 표상으로서의 범이다. 또 시련 많은 짐승은 잘못된 선택을 한 불특정 대중들이다. 호랑이에게 물려갈 자들은 바로 잘못된 선택을 하고서도 허퉁해 할 줄 모르는 대중이다.

  그럴 때 시적 자아는 ‘머릿속을 두드리는 쇳소리’를 듣는다. 민중의 삶이 피혜해지는 경고음을 듣는다.

 그래서 시에 담아내는 언어들은 희망(속살거리는 봄바람)의 소리를 듣는다. 사람들은 범이 무서워 한탄마저 함부로 남발할 수 없다. 그렇지만 시정신으로 무장한 시인은 속살거리는 봄바람 속에 “날을 세운다” 무도한 권력의 칼에 맞설 수 있는 것은 그보다 더 강력한 무기가 아닌가. 어떤 강력한 무기로도 뚫을 수 없는 가장 부드러운 힘, 바로 ‘봄바람’이다. 바로 시의 언어요, 시정신의 힘이다.

 
 이동희 <시인, 문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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