샘터니즘이 사라진 사회, 샘터니즘이 그립다
샘터니즘이 사라진 사회, 샘터니즘이 그립다
  • 이성순 법무사
  • 승인 2024.01.29 14:54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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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순 법무사

 우리나라에는 샘터라는 월간잡지가 있다. 1970년 4월에 창간되어 한때 휴간의 어려움을 겪기도 하였으나 여전히 전 국민의 사랑을 받은채 50년이 넘는 세월을 소시민과 약간 이상의 지식인들 필독서였던 월간잡지였다. 1970년대, 그리고 1980년대에 어디 여행이라도 갈라치면 손에 샘터 한 권은 끼고 차에 올라야 교양인으로 대접받던 잡지이기도 하였고, 더벅머리 총각들이 시골 다방에서 아가씨에게 말이라도 붙일라치면 으레 손에 들고 흔들어대야 글꼴이나 읽어본 사람이라는 인상과 함께 후대를 받던 시기이기도 하였다.

 샘터라는 잡지를 창간한 사람은 국회의장을 역임한 정치인 김재순이다. 최초 민주당을 통하여 야당 인사로 정계 입문을 하였으나 5·16 군사 정변 후 집권당에 입당하였으나 박정희의 3선개헌 시도에 반대하다 곤욕을 치른 이외에는 줄곧 민주공화당, 민주정의당 등 양지를 쫓다 정계에서 은퇴한 정치인이다.

 나 역시 지금은 샘터라는 책을 읽어본 지 너무 오래되었으나 어려서는 외삼촌의 서재에 꽂혀있던 샘터를, 나이가 들어서는 겉멋에 손에 들고 고속버스에서, 기차 속에서 읽었던 기억이 생생하던 책이다.

 김재순이라는 정치인의 정치역정과 걸맞게 샘터라는 잡지는 일반 소시민의 소소한 행복, 그리고 중간 이상의 경제력과 영리하며 먹물 든 사람들이 읽거나 듣기에 딱 좋은 마음을 훈훈해지게 만드는 그러한 논조의 수필과 시를 많이 실었던 잡지로 기억하고 있다.

 샘터가 활발하게 창간되고 읽히던 시대는 주로 박정희, 전두환의 군사정권 시절이었다. 1972년 10월 유신으로 본격적으로 시작된 합법을 가장한 박정희의 철권정치시대에 유신정우회라는 박정희 정권의 친위부대와 거대 여당인 민주공화당을 상대로 야당인 신민당은 그 숨 막히는 치하에서도 여당과 매일 혈투를 벌이다시피 하였다.

 그 당시 샘터의 논조는 ‘양편 모두 다 옳지는 않으나 그래도 대화로 해결해야 한다’거나 혹은 한가롭게 중용을 외쳐가며 짐짓 점잖은 척하는 지식인의 역할을 하는 듯하였으나 정확하게 판단하자면 ‘집안의 도둑을 몰아내는데에도 대화가 필요하다’는 논지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고 결과적으로는 체제에 순응하라는 취지의 논지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래서 그 당시 항간에는 ‘샘터니즘’이라는 말이 유행했던 적이 있었다. 이는 겉으로는 合理(합리)와 中庸(중용)을 내세우면서 사실은 반칙을 저지른 선수를 비호하고 상대를 억압하는데 이용하는 영리한 기회주의자들을 대변하는 말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최근 나는 우리의 정치판을 바라보면서 그렇게 대중을 우롱하였던 ’샘터니즘‘이 그립기만 하다.

 지금의 정치 현실이 과거 군사정권 치하가 아니고 전 세계에서 가장 성숙한 민주국가인 대한민국이어서 더더욱 그 ‘샘터니즘’이 그립기만 하다.

 우선 여건, 야건 ‘적당히’를 모른다. 대화는 아예 없다. 오로지 양극단의 첨예한 대립이 있을 뿐이다.

 대통령 영부인의 명품백 논란을 살펴보자. 함정취재니 의도를 가진 자의 불법촬영이니 같은 말은 하지도 말고 논하지도 말자. 위 논란에는 두 가지의 논점이 있다. 하나는 영부인이라는 위치에서 수수한 선물, 두 번째는 너무나도 쉬운 영부인에게의 접근이다. 영부인이라는 그 엄중함에서 선물은 당연하게 반려했어야 맞고, 접근하기 전 상대의 신상파악과 경호조처는 너무나도 당연하였다. 또한, 보도가 나오자마자 대통령실에서는 즉각 사실 파악과 필요한 조처를 해야 했었다. 즉각 선물을 받게 된 경위, 영부인에게 접근하게 된 경위와 경호상의 문제점, 수수한 명품백의 처리, 필요한 경우 감사원이나 수사기관의 필요한 조처를 한 후 국민에게 그 결과를 소상하게 밝히고 책임을 질 사람에게는 책임을 지워야 한다.

 그러나 그 이후의 처리 결과를 지켜보자. 명확한 사실을 밝히지 않으면서 ‘사과는 또 다른 논란을 일으키고 정치적으로 이용당할 우려가 있다’라며 사과는커녕 마리 앙투아네트의 국민적 감성을 언급한 여권의 어느 위원에게 가해진 사퇴압박으로 응대하고 있다. 그렇다고 그 논란이 해결될 것이라 진정 믿고 있는지 그 생각의 편협함에 아연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그 논란의 와중에 샘터니즘은 없다. 그냥 내 편, 네 편이 있을 뿐이고, 여와 야가 있을 뿐이다. 중간자가 설 자리는 아예 존재를 하지 못하게 만들어버렸다,

 우리 전라북도는 설렘에 갑진년을 맞이하였고, 그 설렘을 전북특별자치도의 출범과 함께 지켜보고 있었다.

 우리들의 기대를 한방에 깨뜨린 우리 전주 출신의 국회의원에 대한 논란을 살펴보자.

 2024. 1. 18. 전북 특별자치도의 출범을 기념하기 위하여 대통령이 우리 전라북도를 방문하여 전북 특별자치도의 출범을 축하하고 많은 지원을 약속하는 자리였다. 그런데 행사 시작도 전에 축하하러 온 대통령을 향하여 항의해댄 그 국회의원은 가뜩이나 새만금 잼버리 축제의 후유증이 가시기도 전에 터진 우리 전북 특별자치도의 출범에 재를 뿌린 격이 되었다.

 남의 잔치 자리에서는 오랜만에 사돈을 만나도 잔치가 끝난 후에 인사를 나누어야 예에 맞는 것이고, 아무리 감정을 상한 이혼한 고모부가 내 상갓집에 찾아오더라도 예로 맞아야 하는 것이 우리네들의 오래된 정서이다.

 그 국회의원의 대통령을 향한 항의가 누구를 향한 항의인지 아는 사람은 다 안다. 마치 우리 동네 의원들이 여권에 항의한다며 국회에 찾아가 삭발하고 사진 찍는 것이나 진배없다고 생각한다.

 과거 실정법에 저촉된 어느 불쌍한 업주의 단속현장에서 겪은 일이다. 한참 필요한 조치를 취하는 와중에 아무런 관련도 없는 옆집 사람이 웃옷을 벗어부치며 항의를 해댄다. 이를 바라보는 업주는 매우 불안한 눈치와 함께 ‘그 웃옷’을 향하여 제발 그만 해달라는 애원과 함께 원망의 눈길을 보낸다.

 대통령을 향한 저 국회의원의 태도에 우리 자랑스러운 전북 특별자치 도민들의 생각이 그와 같을 것이다.

 그 논란에도 샘터니즘은 없었다. 오로지 내 편과 네 편만이 있을 뿐이었다.

 過猶不及(과유불급)과 中庸(중용)이 내내 뇌리를 스친다.

 양대 논란에 관하여 전주 한옥마을에서 만난 젊었을 적 시골 면장이나 하다못해 부면장이라도 했을 법한 노인네가 배배 꼬인 목소리로 일갈한다. “우리네 사람들은 모두 君王(군왕)인가벼, 군왕은 無恥(무치)라고 안혀? 도대체 창피함을 몰라. 끙”

 이번 주말에 나도 친구들과 모악산에 올라 無恥(무치)한 군왕놀이라도 할까 싶다.

 이성순<법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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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화 2024-03-30 14:23:54
100%공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