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만의 시대, 이젠 끝내야 한다
야만의 시대, 이젠 끝내야 한다
  • 김학수 전라북도변호사회 회장
  • 승인 2024.01.11 15: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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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학수 전라북도변호사회 회장

 마녀사냥은 중세 초기부터 근대 초기까지 유럽, 북아메리카, 북아프리카 일대에 행해졌던 마녀나 마법행위에 대한 추궁과 재판, 형벌에 이르는 과정을 말한다. 비록 ‘재판’이라는 절차를 거쳤지만, 일단 마녀로 지목받으면 자신이 마녀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할 방법이 없기 때문에, 스스로 목숨을 끊든 사형을 당하든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근대 형사법은 무죄추정의 원칙, 증거재판주의, 적법절차의 원리를 핵심가치로 내세우는데, 이것은 마녀사냥의 야만성에 대한 반성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이런 원칙이 갑자기 완성된 것은 아니고, 제대로 뿌리를 내리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1963년 미국 애리조나주 경찰은 멕시코계 미국인 에르네스토 미란다(Ernesto Miranda)를 납치·강간 혐의로 체포했다. 미란다는 변호사도 선임하지 않은 상태에서 조사를 받았고, 처음에는 무죄를 주장하다가 약 2시간 후 범행을 인정하는 구두 자백과 자백진술서를 제출했다.

 재판이 시작되자 미란다는 경찰에서 했던 자백을 번복하였으나, 애리조나 주법원은 그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고 중형을 선고했다. 미란다는 주대법원에 상고했지만 역시 무죄가 인정되지 않자 「미국 수정헌법」 제5조(적법절차의 원리, 진술거부권)와 제6조(변호인의 조력을 받은 권리)를 근거로 연방대법원에 상고하였고, 연방대법원은 그가 진술거부권, 변호인선임권 등의 권리를 고지(告知)받지 못했기 때문에 그의 자백을 유죄의 증거로 삼을 수 없다는 이유로 무죄를 선고하였다.

 그 후 ‘미란다원칙’이라는 용어가 생겼고, 체포과정에서 진술거부권과 변호인선임권을 고지받지 못하면 그 진술을 유죄의 증거로 쓸 수 없게 되었다. 우리나라의 형사소송법도 미란다원칙과 유사한 내용을 규정하고 있다. 근대형법이 체계화되기 시작한 것이 1700년대 중반이니까 미란다원칙이 확립되기까지 200년 정도가 걸린 셈이다.

 언뜻 생각해보면 ‘스스로 범행을 자백했는데 왜 무죄지?’라는 의문이 생길 수 있다. 하지만, 단 한 사람이라도 억울한 사람이 없게 하려면 형사절차에서 진술거부권과 변호인선임권이 최우선적으로 보장되어야 한다는 것이 문명사회의 선언이고, 그것이 야만사회와 구별되는 핵심가치라는 것을 되새길 필요가 있다.

 얼마 전 유명 연예인이 마약 혐의로 조사를 받다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가 왜 스스로 목숨을 끊었는지는 정확하게 알 수가 없지만, 그가 목숨을 끊기 직전에 모 언론매체에서 협박범과의 카톡 대화내용이 보도되어 은밀한 사생활이 공개된 것이 매우 결정적인 원인이 되었을 것이라는 의심이 든다.

 그가 유명 연예인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마약 혐의가 대대적으로 보도되고 조사과정이 실시간으로 중계되다가 급기야 범죄사실과 아무런 관련이 없는 사적 대화내용이 보도됨으로써 극심한 모멸감과 좌절감에 빠지고 끝내 스스로 목숨을 끊게 했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자신의 명예를 목숨보다 더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아무리 형사절차에서 무죄추정의 원칙, 증거재판주의, 적법절차원리가 보장된다고 한들, 수사과정이 고스란히 언론에 보도되고 범죄사실과 관련이 없는 은밀한 사적 대화까지 공개되어 명예가 훼손된다면 이것이 마녀사냥과 얼마나 다른 것일까?

 명예란 단순히 ‘다른 사람보다 더 훌륭한 사람’이라는 평가만 명예가 아니라 자신의 부끄러운 부분을 드러내지 않고 싶은 감정도 포함된다는 것이다. 그는 ‘마약범죄자’라는 불명예를 얻었을 뿐만 아니라 숨기고 싶은 사적 대화가 노출됨으로써 ‘도덕적으로 매우 나쁜 사람’이라는 비난의 화살을 맞게 되었고 급기야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유명 연예인이니까 사건의 진행과정이 궁금할 수는 있다. 하지만 선을 넘어서는 안 된다. 이제는 ‘사회적 마녀사냥’을 끝내야 한다. 그것이 문명사회로 가는 길이다.

 김학수 <전라북도변호사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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