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수의 전제정
다수의 전제정
  • 장상록 완주군농업기술센터
  • 승인 2024.01.11 0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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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상록 완주군농업기술센터
장상록 완주군농업기술센터

고려 현종(顯宗)과 조선 선조(宣祖)에겐 닮은 부분이 있다. 먼저, 왕조가 멸망하는 순간까지 모든 왕은 그들 후손이었다. 두 번째, 정통성 부분에서 현종은 왕건 손자였지만 사생아였고 선조는 방계가 왕위를 계승한 첫 사례였다. 마지막으로 그들은 재위 중 전란을 겪어야 했다.

몽진을 선택한 것도 같다. 현종은 거란 2차 침공 당시 나주까지, 선조는 의주로 피란했다. 그런데 평가는 상반된다. 당대 최충의 평가다.

“현종 치세야말로 주나라 성왕(成王)·강왕(康王)과 한나라 문제(文帝)·경제(景帝)에 견주어도 전혀 손색이 없을 것이다.” 후대 이제현(李齊賢)은 최충을 언급하면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현종과 같은 임금은 공자가 말한 것과 같이 더 이상의 말이 필요 없는 군주라 할 것이다.”

반면 선조에 대한 시각은 전란을 초래하고 백성을 등진 암군이라는 평가가 주를 이루고 있다.

현종과 선조에 대한 상반된 평가는 전쟁 수행 과정은 물론 그 이후 역사전개와도 관련이 있다.

고려는 전쟁은 물론 외교에 있어서도 조선과는 대응방식이 달랐다. 그 중에서도 거란과의 관계에서 보여준 외교와 군사적 실력은 지금 봐도 흠을 찾기 어렵다. 한족(漢族) 왕조인 명(明)에 대한 맹목적 사대에 매몰되었던 조선과 달리 고려는 송(宋)과 거란사이에서 다자외교를 잘 수행했다. 군사적으로도 귀주대첩에서 승리함으로써 고려 위상을 동아시아의 강자로 각인시킬 수 있었다. 현종이후 100년간 고려는 평화와 문화의 창달을 누렸다.

현종이 그랬듯이 선조가 피란길에 오른 것도 불가피했다. 선조가 서울에 남아 일전을 치렀다면 시나리오는 둘 중 하나가 되었을 것이다. 전사하거나 포로가 되는 것이다. 부산성, 동래성 그리고 신립의 탄금대 전투에서 전력 차는 이미 검증이 끝난 상태였다. 왕이 있는 서울에서의 결전이 진주성 전투와 같을 수는 없다. 선조가 죽거나 포로가 되는 상황은 국가 존망과 관련된 문제다.

드라마, 영화, 유튜브에서까지 다양한 역사해석이 등장한다. 저변이 넓어지는 것은 거의 모든 분야에서 질적 발전을 가져온다. 다만 거기엔 전제가 있다. 비판적 안목이다.

강조가 폐위한 목종(穆宗) 후임으로 현종이 왕위에 오른 것이 거란 2차 침략의 명분이었다. 그리고 현종은 나주까지 몽진을 했다. 임진왜란에 대해 선조가 져야할 책임은 한국사가 존재하는 한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그와는 별개로 선조의 몽진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에 대한 평가는 그 누구도 아닌 나의 몫이다.

누가 내게 이렇게 말했다. “당신 책에는 당신 주장만 나온다.”

그렇다. 나는 내 얘기를 할 뿐이다.

다수가 말하는 역사 해석만이 선이라면 그 사회는 ‘다수의 전제정’ 상태다.

 

장상록 <완주군농업기술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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