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후 정의(正義)를 생각한다
기후 정의(正義)를 생각한다
  • 송호석 전북지방환경청장
  • 승인 2023.12.14 17: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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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호석 전북지방환경청장

 전 세계 최대 쌀 수출국이면서 세계 시장의 40%를 차지하는 인도가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쌀 수출을 제한했다. 지난여름 가뭄에 이은 폭우로 수확량이 급감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의 ‘쌀’ 자급률은 92.8%에 달하기 때문에 그리 큰 타격을 입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제한하는 품목이 쌀 이외의 다른 곡물이라면 상황은 다르다. 우리나라의 곡물 자급률은 20%, 특히, 밀의 자급률은 0.8%에 불과하다. 실제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초기 밀값이 폭등하자 주요 밀 생산국들은 줄줄이 수출을 제한했으며, 이는 다른 곡물 가격의 상승으로 이어졌다.

 곡물 생산량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은 기후이다. 지난 3월 IPCC(기후변화에 관한 정부 간 협의체)가 발표한 최신 보고서에 따르면, 현재 수준의 감축 노력으로는 20년 내에 1.5도 기온 상승을 막을 수 없다고 한다. 이 경우, 2050년 주요 곡물 가격이 최대 23% 상승할 것이란 예측도 내놨다. 이는 기후 위기로 식량 생산성은 떨어지는 데 반해 세계 인구 증가로 늘어난 수요를 감당할 수 없어 가장 취약한 계층, 가장 빈곤한 나라부터 피해를 입을 것임을 의미한다.

 그래서 기후위기는 정의의 문제, 불평등의 문제와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다.

 1750년부터 2021년까지 세계 각국의 이산화탄소 누적 배출량을 조사한 결과, 고소득 국가가 모여 있는 유럽과 북아메리카의 누적 배출량은 전 세계 누적 배출량의 58.81%를 차지하는 반면, 아프리카의 누적 배출량은 2.83%에 불과한 것으로 나타났다.

 지난 200년간 서구 고소득 국가 등은 산업화 과정에서 대량의 온실가스를 배출했기 때문에 지구 온난화의 최대 원인자라 할 수 있다. 우리가 아는 정의 관념은 많이 배출한 국가가 더 많은 책임과 부담을 지는 것이지만, 기후변화 문제는 이 정의를 따르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IPCC의 2022년 발표에 따르면 아프리카, 남아시아, 중남미 등이 기후위기 취약지로 분류되며, 이들 지역에서 홍수, 가뭄, 폭풍 등에 의한 인명피해가 타지역보다 15배나 더 많이 발생한다고 한다.

 같은 국가 내에서도 고소득층과 저소득층의 기후 위기에 대한 책임과 피해는 다르다. 2020년 국제환경단체 옥스팜이 발표한 보고서에 따르면 전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1%가 배출한 이산화탄소량이 전 세계 배출량의 15%를 차지한다. 상위 10% 소득범위까지 확대하면 배출되는 이산화탄소량은 절반에 육박한다. 반면, 하위 50%가 배출한 이산화탄소량은 7%에 불과하다.

 기후 위기는 세대 간의 정의 문제도 불러온다. 기성세대는 온실가스를 무한정 배출하면서 수많은 편익을 누려왔지만 지금 어린 세대, 미래 세대는 우리가 누렸던 편익을 누릴 수 없다. 오히려 기성세대가 배출한 온실가스로 인한 기후 위기를 고스란히 감당하고 해결해야 하는 책임까지 떠안게 됐다. 그러나 이렇게 미래 세대에게 책임을 전가하고, 기후 격변이 눈앞에 닥친 상황에서도 각 국가의 이득이 중시되는 게 지금 국제 기후 정치의 현실이다.

 지난 12월13일, 두바이에서 개최된 유엔 기후변화협약 당사국총회(COP28)에서는 참가국들의 최대 쟁점이었던 ‘화석연료의 퇴출’이 산유국들의 반발로 무산돼 버렸다. 대신 ‘화석연료로부터의 전환’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여 기후위기 대응을 ‘각국의 선택사항’에 불과하게 만들어버렸다. 지구온난화로 국토가 언제 잠길지 모르는 태평양 섬나라들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기후 위기는 전 세계가 함께 노력해야 하는 문제인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전 인류 모두가 똑같은 책임과 의무로 온실가스를 줄여야 한다고 하면 이는 또 다른 불평등을 초래하는 것이다. 더 많이 배출한 국가, 더 많이 소비한 계층, 더 일찍 태어난 세대에게 그에 합당한 부담을 지우는 것, 그것이 정의이지 않을까?

 송호석 <전북지방환경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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