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어서 인물속으로] 한민족 역사문화탐방 (18)경허선사
[걸어서 인물속으로] 한민족 역사문화탐방 (18)경허선사
  • 이방희 기자
  • 승인 2023.12.13 18:1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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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누구인가? 그리고 무엇이 나인가?

참나를 찾아가는 선 수행! 파랑새 구국의 민족혼을 살려내다.
 

삼라만상이 다 나름대로 특성과 기능을 발휘하여 각자 공로가
인정받는 풍토를 조성하고 대 자연을 경영하며 공존하고 있다.
만물의 영장인 사람이 개성과 능력을 방해받지 않고 저마다의
역량을 발휘한다면 더불어 사는 세상 얼마나 행복한 인생인가.

모질고 풍진 거친세상 헤치고 살자면 사람은 본능으로 거짓을
말할 때도 있고 애궂은 짓들을 마지못해 애써 할 수도 있었다.
한 손으로 하늘을 가리고 두발로 땅을 덮고 감언이설로 사람을
속일지라도 정녕 자신을 속이지 않는 바른양심은 남아야 한다.
 

스스로 자신을 기만하고 참나를 포기한다면 영원히 깨우치려는
기회조차 만들 수도 없고 혜원상생의 계기도 얻지 못할 것이다.
거짓이 또 다른 거짓을 부르는 허물을 만들지 않으려면 우리는
양심을 팔지 않으며 한 점 부끄럼 없도록 자신을 지켜야 한다.

말이 아니면 섞지 말고 글이 아니면 쓰지 말고 정도가 아니면
가지 말것이며 참 벗이 아니라면 정념으로 사귀지 말아야 한다.
성현은 공간도 시간도 집으로 와 머문다 생각했고 어딘가 터를
잡으면 공간이 모여 자리 틀고 울타리 치며 한울 함께 살았다.

생명은 탄생 자체가 신비한 기적의 만남으로 생일 축하를 하고
탄생이 거룩하듯 죽음도 위대한 열매로 씨앗을 남겨 줄 것이다.
씨앗들이 눈떠 세상을 마주 보는 화창한 봄날에 가슴 열어내며
내가 나라고 내가 주인임을 아는 사람중심 참 진리를 꺼내보자.

/백승기 박사

경허선사 열반 100주년 기념탑

 ▲경허선사와 전봉준(김주원 뱅기노자 대표·교사)

  한국 근현대 불교를 개창한 대선사 경허(鏡虛) 선사는 1849년 완주 우동면 구암리에서 출생했다. 본관은 여산(礪山)으로 속명은 송동욱이다. 어린 나이에 부친 송두옥을 여의고 9세 되던 해에 출가를 하게 된다. 가장인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시니 여전히 어린나이인 9세에 가장으로써 식솔을 거느려야할 책임감을 짊어지고 출가하였을지도 모르겠다. 출가 뒤에도 어머니와 여동생을 돌보며 집안의 대소사를 직접 챙겼다.

  경허 선사의 출생지인 완주 구암리 인근 마을 봉상면 구마리에 전창혁이 살고 있었고 그의 아들인 전봉준이 1855년에 태어났다. 경허 선사와 6살 남짓 차이가 나는데 경허는 전봉준의 굳은 심지를 알아보고 어린 여동생을 전봉준에게 시집보내기로 마음을 먹는다. 전봉준의 아버지 전창혁에게 혼사 택일을 의논하는 글 말미에 ‘사문경허(沙門鏡虛)’라고 쓴 기록이 있다. 출가 후에도 집안의 대소사를 챙겼던 경허는 아버지 역할로 여동생을 전봉준에게 시집보냄으로써 매제와 처남의 관계를 맺게 된다.

완주 봉동 구암마을 거북바위
완주 봉동 구암마을 거북바위

  전봉준은 처남인 경허 선사와 집안의 형님 같은 존재이면서 동시에 동학농민군을 일으키는 사상적 동료이기도 했기에 거병 계획과 첫 거병 장소까지 상의했다. 1894년 우금치 전투에서 동학군은 괴멸되다시피 했고, 전봉준마저 관군에 붙잡힌 후 전봉준의 일가친척들이 잡히는 대로 사살당하는 상황이 되었다. 이 때 경허선사는 전봉준과 여동생과의 사이에 태어난 조카딸 전옥련을 살리기 위해 함께 도망 길에 올라 1894년 10월, 마이산 고금당으로 숨어들었다. 당시 마이산은 외지인들이 쉽게 오갈 수 없는 오지였고, 김옥련으로 이름까지 고쳐 금당사의 공양주로 있다가 죽음을 면한 뒤 27세에 이영찬과 결혼하게 된다. 이뿐 아니라 전봉준의 시신을 몰래 수습하였다고 한다.

  전봉준 사망 후 경허 선사도 군산 비안도에서 숨어 지내다가 조카딸을 걱정하는 마음에 가끔 금당사에 왔다고 한다. 이 때 쓴 시가 전해지는데 제목은 ‘자롱청산(自弄靑山)’이다.

  산은 절로 푸르고 물도 절로 푸른데

  맑은 바람 솔솔 불고 흰구름 두둥실 흘러가네

  하루 종일 반석에서 놀아 본다

  내가 세상을 버렸으니 다시 무엇을 바라겠는가

  조카딸을 시집보낸 후 경허는 제자 만공에게 전법계를 주고 북한 지방의 삼수갑산에서 숨어 살면서 승복도 벗고 훈장 노릇을 하면서 입적할 때 까지 무애행(無碍行)을 이어갔다.

 

구암마을 거북바위
구암마을 거북바위

▲전봉준의 딸을 구하다(신동만 나그네연맹 회장)

  경허선사(鏡虛禪師)의 여동생은 동학혁명의 지도자 전봉준(全琫準)과 결혼했다. 따라서 전봉준 장군은 경허선사의 매제(妹弟)이다. 송희옥을 비롯하여 여산 송씨 일가들이 동학혁명에 적극 가담한 것도 이런 친연관계도 일부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특히 동학농민군의 4대 강령 중 첫째인 사람을 함부로 죽이지 말며 백성의 재물을 빼앗지 말라(不殺人不殺物)는 경허의 사상이 크게 작용했을 것으로 본다. 송씨 부인은 1876년 장녀 전옥련을 낳고 이듬해 차녀 전성녀를 낳고 바로 사망했다. 전봉준은 어린 딸들을 양육하기 위해 젖이 잘 나오는 청상과부 이순영을 젖어미로 집안에 들였다. 남평 이씨(南平 李氏) 이문기의 딸 이순영은 어린 나이에 남편을 잃고 19세에 전봉준 집안에 들어갔다가 자연스럽게 후처가 됐다. 두 딸을 친딸처럼 키우다 1879년에 장남 전용규 낳고 1882년 차남 전용현을 낳았다. 장남 전용규가 1894년 16살에 폐병이 걸리자 차남 전용현은 전염을 막고자 시집간 큰 누나 전옥련 집으로 보내졌다. 1895년 아버지가 처형되자 누나 전옥례는 전용현의 이름을 전의천으로 바꿔주었다. 모친 이순영은 장남 전용규를 데리고 산 속으로 숨어 들어가 토굴 속에서 생활했다.

열반송
열반송

 경허선사는 전봉준 장군이 교수형을 당하자 시신을 수습하여 아마도 청계사 인근에 가매장하였던 것 같다. 나중에 1919년 전봉준의 차남 전용현이 정읍 비봉산자락으로 이장하였다. 경허선사는 멸문지화의 위기에 놓인 전봉준 가문을 구하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다. 이때 경허선사가 전봉준의 둘째 딸 전성녀를 진안 마이산 금당사로 도피시켰다. 금당사 안에서도 사방을 조망하기 쉽고 유사시 안전한 곳으로 피난하기 좋은 고금당(古金堂)으로 데려갔다. 고금당은 고려시대 나옹화상이 수행했던 곳이기도 했다. 평소 인연이 있던 독립지사이며 금당사 주지였던 김대완 스님에게 조카딸을 맡겼다. 나중에 그녀의 모친 이순영 씨도 함께 살게 되었다. 경허선사는 이 시기 호서지방 수덕사, 개심사, 문수사, 마곡사, 태고사, 갑사, 법주사와 영호남의 범어사, 해인사, 화엄사, 송광사, 천은사, 백장암, 태안사 등 수많은 사찰에 선방(禪房)을 차리고 수행을 지도했으며 혜월, 수월, 만공, 한암 등 훌륭한 제자들을 교육하여 단절된 선맥(禪脈)을 잇는 등 정신없이 바쁜 때였다. 그러나, 아무리 바빠도 1년에 한두 번은 꼭 고금당을 찾아 조카딸의 안위를 살폈다. 입산 5년만인 1899년 전성녀의 나이 23살에 인근 진안 부귀에 사는 이영찬에게 시집을 보냈다. 이때 전봉준의 딸이라는 것을 숨기기 위해 이름을 김옥련으로 개명하였다. 전성녀는 시집을 가서도 모친 이순영을 모셨다. 그러나 폐병 때문에 4년 만인 1903년 44세의 나이로 전봉준의 아내이자 네 자녀의 모친인 이순영은 사망하였다. 경허선사는 전봉준의 장남이 폐병으로 일찍 죽자 차남인 전용현을 무안의 동학교도들이 많은 배씨 집성촌으로 보내 끝까지 혈족의 안전을 도모했다. 전용현은 살아남아 결혼하여 결국 대를 이어 장군의 혈통을 이었다.

  이후 경허선사는 3족(三族: 親族/妻族/外族)을 멸하는 역적의 신분이라 일제의 끈질긴 추적을 피해 승복을 벗고 박난주(朴蘭州)로 개명하여 북한의 삼수갑산(三水甲山)으로 들어갔다. 산골마을의 훈장을 하면 후학을 양성하고 독립지사 김탁 등을 길러내다가 1912년 4월 25일에 입적하였다. 세수(世壽) 64세, 법랍(法臘) 56세다. 1년 4개월 늦게 열반 소식을 들은 제자 만공(滿空)과 혜월(慧月) 스님이 갑산에 달려가 법구(法軀)를 모셔와 예산 덕숭산(德崇山) 수덕사에 다비(茶毘)하여 모셨다.

천장사
천장사

 ▲경허가 북쪽으로 간 까닭은?(박창보 국학박사)

경허가 태어난 해는 철종이 안동김씨 일족의 세도정치를 위한 목적에 따라 옹립된 1849년이다. 방계인데다 일자무식의 무지렁이가 보위에 오르니 대왕대비의 수렴청정과 실정으로 삼정이 문란해지고 탐관오리가 횡행하였다. 질곡과 도탄에 빠진 백성들에 의해 각종 민란이 일어났다. 재위 14년 만에 승하 후 고종이 등극하였다. 부친 흥선의 10년간 섭정과 친정이후도 개항과 외세의 간섭 등으로 내외의 어수선한 혼란과 위기는 강제 퇴위될 때까지 계속되었다.

경허의 일생은 이 시기 한 갑자를 조금 넘게 사는 동안 지리멸렬하던 조선불교의 선승으로 우뚝 선 선각자였다. 숭유억불의 나라에서 특히 구한말의 불교는 명맥을 유지하기 위한 사판승이 대부분이었다. 먹고살기 힘든 시대에 착실히 앉아 경전을 연구하고 참선수행과 포교활동을 하는 이판승보다 잡역을 하거나 물건을 팔아 생계를 유지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때론 걸승의 숫자도 만만치 않았으니 대승불교로서의 교종과 선종의 의미도 사라졌다. 중생구제와 큰스님은 커녕 막행막식과 여색, 도박이 횡행하는 분위기였다. 더구나 일본은 조선침략에 앞서 일인 승려에 의한 포교를 도구로 삼으려 하였다.

천장사
천장사

어린 시절 부친을 잃고 형을 따라 출가한 경허는 생활고와 막다른 집안형편의 절망과 단념에 따른 선택이었다. 어려운 수행 가운데서도 모친과 여동생을 돌볼 만큼 심지가 굳고 정이 많은 사람이었다. 심부름이나 하고 잡일만 하던 사미승으로서 주지 계허에게 배울 것은 없었다. 운 좋게도 절에 머무르던 한 선비에게 문자를 익히고 학문에 눈을 뜨게 되었다. 일취월장의 재능은 타고난 명석함과 집중력이 바탕이 되었을 것이다. 선비의 권유와 계허의 주선에 의해 동학사로 옮겨 만화로부터 경전과 제자백가를 공부하고 그 자질을 인정받아 마침내 대중에게 화엄경을 강의하는 수준에 이르렀다.

환속한 옛 스승 계허를 찾아뵙기 위한 여정 중에 콜레라의 창궐로 많은 사람들이 죽어나가는 참상을 목도하게 되었다. 생과 사의 갈림길에서 많이 배운 학승이라 한들 죽음 앞에서의 한계를 느끼고 돌아와 참선에 들었다. 용맹정진 후 마침내 콧구멍 없는 소라는 화두에서 끌려 다니지 않는 자유와 해탈의 깨달음을 얻었다. 성우라는 법명에서 보듯 깨달았으되 인정해 줄 스승이나 선승이 없어도 선풍을 일으켜 전국을 누비고 다녔다. 선원을 개설하고 수월, 혜월, 월면(만공), 지음자로 인정한 한암 등의 제자를 배출한 선종의 중흥조가 되었다. 현재 남진제 북송담이라는 법맥이 이어지고 있다.

경허는 형식이나 계율에 얽매이지 않고 요석공주와 결혼을 하여 설총을 낳는 등 파격적인 행보와 기행을 보인 원효를 닮았다. 술과 고기, 심지어 문둥병이 있는 여인과 동침을 하는 등의 행적으로 숱한 음해를 받았다. 실제 출가한 청계사는 당취승(땡초)들의 소굴이어서 보고 배운 것이 습관이 되었다는 고백도 하였다. 한편 무엇에도 방해받지 않고 자유롭게 행동한다는 무애행의 경지에 올랐다는 등의 상반된 평가가 갈린다.

1895년 동학농민혁명으로 전봉준이 처형당하였는데 첫 번째 군율이 사람을 죽이지 말고 물건을 해치지 말라는 것으로 매형인 경허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전봉준의 시신을 몰래 수습한 이를 경허로 추정하고 있는데 조카들을 피신시켜 돌보기도 하였다. 연좌제로 역적은 3족을 멸하는 사회에서 늘 쫓기는 신세가 되었다. 그에 따른 스트레스와 불안감으로 기행을 더 했을 것이고 헛된 명성을 유발하였다.

경허 노래
경허 노래

말년에 초행의 삼수갑산에서 머리를 기르고 박난주로 개명을 하여 훈장역할을 하다 1912년 입적하였다. 유작으로 경허집이 있으며 그가 남긴 많은 시는 선시 뿐 아니라 술, 여자, 허무, 고독, 이별, 염세, 은둔, 우국, 늙음, 지음자가 없는데 대한 한탄에 관한 내용이다. 그로 비추어 보면 자신의 삶에 대한 회한과 인생무상을 표현한 것이다.

경허가 북쪽으로 간 까닭은 헛된 명성을 뒤로하고 오지에서 입전수수를 하기 위한 목적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른바 깨달음을 얻고 난 뒤 중생과 아픔을 함께하는 십우도의 마지막 단계를 실천하기 위함이었다. 경허선사는 법호처럼 빈 거울이 아니었다. 비었다는 것은 결국 가득 채워 비추기 위함이 아니었겠는가!

 

*전봉준의 자녀 관련 연구는 홍현지 경허선사 연구가·여산 송씨측 등 연구가들의 주장이 서로 달라 자문위원의 상반된 글을 그대로 게재합니다.

<기획취재팀>

▲취재기자단

△이방희 제2사회부장(부국장/팀장)

△배종갑 기자(제2사회부/완주)

▲자문위원

△박창보 국학박사

△백승기 도시공학박사, ‘무릉도원 상상캠프’ 슈퍼바이저

△김주원 (주)뱅기노자 대표, 교사

△고혜선 전 권번예술원 대표, 한옥마을사람들 대표

△고개희 전사들 사무총장, 교보생명 신논현지점장

△신동만 나그네연맹 회장

△윤재민 (주)RNS 대표, 신지식장학회 청년국장

△김세용 전사들 산악대장

△이주원 디자인 원 대표

 

이방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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