빅블러 시대
빅블러 시대
  • 방극봉 전북은행 부행장
  • 승인 2023.12.12 15: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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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극봉 전북은행 부행장

1990년대 일본의 버블경제가 붕괴되던 당시, 일본 주류업계의 어려운 상황을 극복하게 했던 것이 있었으니 바로 ‘하이볼’이다.

2000년대 초에 등장한 하이볼은 기존 위스키에 비해 도수가 낮고 가격이 저렴해 접근성이 좋았다. 무엇보다 탄산음료와 주류의 경계에서 기존의 고급스러운 이미지를 유지하면서도 누구나 부담 없이 즐길 수 있다는 장점이 있어 하이볼은 당시 일본 주류업계가 경제위기를 극복하는데 한 몫 단단히 했다고 한다.

한국도 요즘 하이볼이 대세다. 한국 주류수출협회에 따르면 2022년도 기준 하이볼의 국내 판매량은 전년대비 20% 이상 증가했다고 한다. 서울의 강남이나 홍대, 이태원 등에 하이볼 전문바(bar)들이 생겨났고, 일반적으로 하이볼은 위스키에 탄산수를 섞는 것이 기본이지만 우리나라 술 시장에서는 그 종류가 좀 더 다양해졌다. 전통주 하이볼, 고량주 하이볼 등 한국화 된 하이볼 문화도 눈여겨 볼 만 한 지점이다. 이처럼 다양한 주종이 섞여 하나의 새로운 술 문화를 만들어 내고 있는 주류 선호도의 변화는 빅블러 현상의 하나의 사례로 설명할 수 있다.

빅블러는 흐릿하다는 영어단어 ‘Blur’에 ‘Big’을 더해 기존의 경계가 모호해지는 현상을 의미한다. 특히 국내에서는 빅블러 현상을 생산자-소비자, 온-오프라인, 제품-서비스 간 경계융화를 중심으로 산업 및 업종 간 경계가 급속히 사라지는 현상으로 정의하고 있다. 1999년 미래학자인 스탠 데이비스와 크리스토퍼 메이어가 저서 「블러 :연결 경제에서의 변화속도」에서 ‘블러’라는 용어를 처음 사용했다. 급속한 사회 및 기술의 변화로 산업간 장벽이 무너지고 결국 비즈니스 간의 구별 자체가 모호해질 것이라는 예측이었다.

그렇다면 이러한 빅블러 현상이 가속화 되는 원인은 무엇일까? 과거에는 업종 간 경계가 분명했던 반면 사물인터넷, 핀테크, 인공지능 등 4차 산업혁명을 통한 기술의 발전과 환경변화 등으로 브랜드 영역 간 경계가 흐려졌다. 또 1인 가구 증가, 코로나19 시대를 거치며 변화된 언택트 문화 확산 등도 빅블러 시대 가속화의 원인으로 꼽힌다.

사실 금융권에서 빅블러라는 용어가 새롭지는 않다. 이미 금융 산업은 다양한 비금융 분야의 기업들과 경쟁하면서 새로운 협력과 혁신의 기회를 만들어 가고 있기 때문이다. 금융과 기술을 결합한 금융 서비스인 핀테크는 대표적인 빅블러의 사례. 기존 은행은 고객이 오프라인 지점에 방문하여 은행 직원을 통해 업무를 처리하는 방식이었다면, 이제는 모바일 뱅킹 등으로 24시간 365일 누구나 입출금을 스스로 할 수 있고 비대면으로도 간단한 은행 업무와 상담이 가능하다. 또한 자산관리, 보험, 투자, 송금, 결제 등 모바일에서 제공되는 서비스의 폭은 더욱 넓어졌다. 디지털 혁신을 추구하며 핀테크와의 협업을 통해 새로운 서비스와 솔루션을 개발하며 기존 금융 산업의 경계를 허물고 새로운 시장을 만들어 가고 있는 것. 빅블러는 의심할 여지없이 금융 산업에 중대한 변화를 가져왔고 미래에 대한 전략을 어떻게 세우고 실행하는지에도 큰 영향을 미칠 것이다.

그렇다면 빅블러의 시대에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고정관념이 아닐까 싶다. 기존에 갖고 있던 생각의 프레임을 깨고 뻔한 스토리가 아닌 창의적 사고를 바탕으로 빅블러 시대를 유연하게 대처해 나가야 한다. 가까운 미래에는 ‘동종업계’라는 말이 무색해질지도 모른다. 기존 질서에 익숙한 기업은 위기에 직면하고 새로운 질서에 적응하는 기업은 기회를 얻는다. 미래지향적 사고와 오픈 마인드로 고정관념을 버리고 서로의 영역을 존중하면서 그 종착지에 서 있는 고객들이 무엇을 원하는지에 대한 진지한 고민이 따를 때 새로운 시장에서의 성공도 따라 올 것이다.

 방극봉 전북은행 부행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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