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가 판사인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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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영주 법률사무소 신세계 대표변호사
  • 승인 2023.12.07 14: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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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영주 법률사무소 신세계 대표변호사
나영주 법률사무소 신세계 대표변호사

일본을 대표하는 영화감독인 구로사와 아키라의 ‘라쇼몽’은 우리가 믿는 진실과 거짓의 경계에 대한 진지한 의문을 담고 있는 영화다.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소설을 원작으로 하는 ‘라쇼몽’은 관련자들의 증언을 토대로 의문사한 사무라이의 진실을 파헤쳐가는 여정을 그리고 있다. 전란이 끊이질 않던 일본의 헤이안 시대, 한 사무라이가 아내와 길을 걷다 산적을 만난다. 산적은 사무라이의 아내를 보고 욕정을 품고 사무라이를 살해한 뒤 아내를 겁탈한다. 얼마간의 시간이 흐른 후 지나가던 나무꾼이 가슴에 칼이 꽂힌 채 죽은 사무라이의 시체를 발견하고 관청에 신고한다. 산적은 체포되고 심문이 벌어진다. 그리고 사건 당사자들은 사건에 대하여 증언을 하지만, 증언은 서로 엇갈린다.

영화는 결말에서 사건 당사자들의 증언 전부가 일정부분 거짓이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무녀를 통해 사건을 진술한 사무라이의 혼령, 체포된 산적, 겁탈당한 사무라이의 아내, 목격자인 나무꾼 저마다 어떤 연유인지 모두 거짓말쟁이였다. 그들은 진실의 일부만 말하고 일부는 거짓으로 말했다.

구로사와 아키라는 인터뷰에서 “인간은 자신의 일에 정직할 수 없다. 자신의 이야기를 할 때는 거짓을 말한다”고 제작의도를 밝혔다. 영화는 감독의 말처럼 인간의 거짓과 위선을 밝힌다. 나아가 영화의 화살은 ‘실체적 진실’을 탐구하는 과정의 한계와 회의에 대한 지독한 불가지론(不可知論)을 겨냥한다.

변호사 일을 시작하기 전 선배 법조인들에게 들은 충고 가운데 아직 기억에 남는 말이 있다. ‘의뢰인의 말을 100% 믿지 마라.’ 구로사와 아키라의 말처럼 인간은 자신의 일에 정직할 수 없다. 마냥 의뢰인의 말을 믿었다가 재판이 진행되고 상대방이 제출한 객관적 증거를 보고 당황했던 경험이 있다. 특히 형사사건은 죄를 추궁당하기에 더욱이 말 그대로 믿기 어렵다.

변호사에게는 솔직히 말해달라고 주문도 하지만, 100% 진실을 말하지 않는다. 심지어 의뢰인은 자기 자신도 속인다. 기억은 왜곡되고 경험은 윤색된다. 검사는 유죄추정의 원칙으로, 변호사는 무죄추정에 기대어 어느 한 편의 일방적인 입장을 전달하면 되지만 형사재판부는 정말 고민이 많겠다는 생각이 든다.

모두가 일정 정도 거짓을 말하고 객관적 증거도 보는 시각에 따라 정반대로 해석되며 모든 것을 마모시키는 시간의 윤색까지 더해지면 과연 ‘실체적 진실’이란 것이 존재하는지 의문이 든다. 방대한 증거기록을 검토하고 법정에서 증인을 대면한 판사도 미궁에 빠진다. 그럼에도 우리는 현재 모두가 판사인 세상에 살고 있다. 언론보도를 봐도 그렇다. ‘관계자’의 말을 인용하여 실시간으로 사건이 중계된다. 일부 기자들은 마치 사실이 확정된 것처럼, 심하게 말해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돌아가 현장을 목격한 것 마냥 기사를 작성한다.

사회적 이슈가 되는 사건을 변호했을 때 사건 기록과 다른 내용의 기사를 보고 화가 난 경험이 있다. ‘팩트’를 추구하는 언론도 7할만 실체적 진실에 가까운 듯하다. 그럼에도 언론을 보면 확신에 차 있다.

기사의 댓글을 보면 모두가 판사인 세상에 살고 있는 착각에 빠진다. 사람들은 너무도 쉽게 사건을 보고, 해석하고, 결론짓는다. 최근 화제인 유명 연예인들의 마약사건만 보아도 그렇다. 확인되지 않은 정보들이 수사기관을 통해 언론에 보도되고, 사람들은 댓글로 어제와 오늘 결론이 다른 판결문을 작성한다.

물론 근거는 없다. 무엇보다 우려스러운 점은 방대한 증거기록과 증언을 들여다보고 고심한 재판부에 대한 존중이 사라져 가는 현실이다. 정치적 사건에 있어 ‘자기편’의 입맛에 맞지 않는 판결이 선고되면 사람들은 판사를 비난한다. 승복할 수는 없어도 존중하는 것이 민주주의다. ‘오직 모를 뿐.’ 숭산 선사의 화두는 선방에 있는 승려가 아닌 모두가 판사인 세상을 사는 우리가 곱씹어야 한다.

나영주 <법률사무소 신세계 대표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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