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어서 인물속으로] 한민족 역사문화탐방 (17)진표율사
[걸어서 인물속으로] 한민족 역사문화탐방 (17)진표율사
  • 이방희 기자
  • 승인 2023.12.06 18:1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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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표율사, 점찰법(占察法)을 수행하며 내일을 그리다.

개구리의 깨우침! ‘윷놀이 문화와 점찰 간자’

좋은 인연은 좋은 생각을 하고 좋은 음식을 나누며 공유하고
좋은 사회는 좋은 사람들과 좋은 하루로 세세인연을 맞이한다.
소매 깃만 스쳐도 인연이요 눈길만 마주쳐도 인연이라 하는데
서로 등 기대면 차오르는 체온 그 따스함은 몇 생의 인연인가?

누구나에게 똑 같은 하루가 찾아오는 것이기에 준비된 몸짓과
편안한 마음으로 희망찬 좋은 하루를 세우고 내일을 준비하자.
건전한 지식과 바른 판단력은 개인의 인격을 높이는 교양으로
올바른 지혜와 확고한 지식으로 홍익의 이화를 갖추어야 한다.

심신을 단련하여 좋은 마음과 태도를 추스르는 다양한 인연은
감정에 빠지지 말고 스스로 조율할 수 있는 수행을 쌓아보자.
상대를 배려할 줄 아는 아량이 넓은 사람은 깊은 명상을 통해
공감의 품격을 높이고 생명력 공생하며 존중하는 세인이 되자.

의지만 내세우지 말고 미래를 예측하는 자신을 아는 사람으로
나만의 특성과 숨은 재능을 개발하여 잠재력을 깨워내야 한다.
타고난 자신의 능력을 발현하고 어떤 일도 해 낼수 있는 힘과
심신통을 배양하는 역량으로 점찰력을 행하며 내일을 그려보자.

독사가 물을 마시면 독이 되고 소가 물을 마시면 젖을 만드니
같은 물이라도 누가 왜 먹느냐에 따라 효용가치가 달라짐이다.
역사는 인간이 공간과 시간을 경영하며 세월을 지키는 것으로
영웅이 공간을 물리고 성현이 시간을 지배하며 흐르는 강이다.

/백승기 박사

금산사

▲진표율사의 탄생과 수행기(신동만 나그네연맹 회장)

미륵신앙의 성지이자 대사찰인 금산사를 중창하고 법상종(法相宗)을 개종(開宗)하였으며 영심(永深), 보종(普宗), 신방(信防), 체진(體珍), 진해(珍海), 진선(眞善), 석충(釋忠) 등 수많은 제자를 기른 진표율사(眞表律師)는 남북국시대 신라의 고승이다. 참고로 율사란 불교의 계율에 정통한 스님에게 붙이는 존칭이다.

탄생지는 완산주(完山州) 만경현(萬頃縣) 대정리(大井里)로 현재 김제시 순동 대리마을이다. 지명의 유래인 한우물(김제시 순동 150-3)은 20여호 남짓한 대리마을에서 250m쯤 떨어진 호남선 철로 옆 논 가에 있다. 아버지는 진내말(眞乃末) 어머니는 길보랑(吉寶娘)이며 성씨(姓氏)는 정(井)씨다.

12세에 개구리 사건으로 금산사로 출가하여 당나라 유학승 출신인 숭제법사(崇濟法師)의 가르침을 받았다. 부안 선계산(仙溪山/변산) 불사의암(不思議庵)에서 3년간 수행을 했다. 득도에 이르지 못하자 크게 낙담하여 절벽에 몸을 던지자 청의동자가 나타나 몸을 받아 목숨을 구해줬다. 이에 다시금 용기를 내어 돌로 온 몸을 두둘기며 참회하는 망신참법(亡身懺法)으로 기도를 하니 7일만에 온 몸이 부서지고 말았다. 그런데 지장보살이 나타나 몸을 치유해주니 더욱 분발하여 구도에 집중하였다. 21일 수행 끝에 천안(天眼)이 열리고 미륵보살의 현신을 맞아 점찰경(占察經) 2권과 간자(簡字/점치는 대쪽) 189개를 받았다. 다시 영산사에서 수행을 계속하여 도를 닦고 마침내 깨달음을 얻었다.

금산사

금산사로가 돌아가 미륵불을 세우고 수행과 실천을 겸비하며 미래의 희망을 제시하는 종교 본연의 가치에 충실한 법상종을 열었다. 금산사를 중창하고 망한 백제의 땅에서 힘겹게 살아가는 백제 유민들에게 마음의 평정과 미래의 희망을 설파하며 민심을 다독였다. 제자 영심과 속리산 법주사를 창건 혹은 중창하고 점찰법회로 귀족에서 천민까지 신분을 초월하여 많은 중생들을 계도하였다. 영심의 제자 심지대사(心地大師)는 신라 왕자로 동화사를 중창하고 진표율사와 염심의 가르침을 펼쳤다. 강릉을 거처 고성에서 화암사(禾巖寺)를 창건하고 금강산에서 발연사(鉢淵寺)를 창건하였다. 이후 법상종이 신라 불교의 중요한 한 축이 되었다. 그는 점찰법회를 열고 흉년에는 빈민들을 구제하는 등 지역을 넘고 신분을 초월하여 부처의 가르침을 실천하였다. 기복신앙(祈福信仰)을 뛰어넘어 미륵십성계(彌勒十善戒)를 닦고 실천하는 적극적 신앙관으로 수행과 실천을 강조했다.

말년에는 고향에 아버지를 모시고 금강산 발연사에 들어가 함께 수행하다 열반하였다. 시신은 유언에 따라 발연사 동쪽 큰 바위 위에서 수행하던 모습 그대로 모시다가 시신이 산화(散華)된 후에 흙으로 덮어 무덤을 만들었다고 한다. 세월이 흐른 뒤 바위틈에서 두 그루의 청솔이 자랐다고 한다.

금산사 모형도

▲점찰법회(박창보 국학박사)

삼국유사에 기록된 신라 중기의 고승 진표는 어려서부터 숭무정신이 있어 무예를 연마하며 사냥을 즐겨했다. 어느 날 개구리를 잡아 버들가지에 꿰어 물속에 넣어두었던 것을 잊고 있다 이듬해 고통에 우는 소리를 듣고 참회하는 마음으로 출가했다. 스스로 고통을 가하는 망신참법을 통해 지장보살의 계를 얻었는데 더욱 정진하여 미륵보살로부터 점찰경(점찰선악업보경)과 간자 189개를 받게 되었다. 그중 8번째와 9번째 간자는 미륵보살 자신의 손가락뼈라며 사람들을 구제하는데 힘쓸 것을 당부했다 한다. 이는 불교의 대중화와 교화에 중요한 기반이 되었다.

진표는 점찰법회를 통해 개인마다 뽑은 간자로 길흉화복을 점치고 결과에 따라 참회하고 수행 정진하게 하였다. 자신의 업보를 깨달아 선업을 쌓을 수 있다는 희망을 주었는데 바로 미래불에 대한 염원이었다. 점칠법회는 진평왕 22년(600)에 중국에서 귀국한 선각자 원광에 의해 신라 최초로 개최되었다. 유학을 떠난 뒤 25년 만에 다양한 불교학을 섭렵하고 돌아 왔으니 원래의 종교적 목적 뿐 아니라 신지식인으로서 다양한 학문을 기반으로 정치, 외교 등의 분야까지 다양한 업적을 쌓았다. 이후 전수받은 점찰법회의 계보는 진표까지 이어져 금산사를 창건하고 제자들은 길상사를 세워 점찰법회를 개설하였다.

금산사 미륵전

간자는 점을 칠 때 점괘가 적힌 표찰로 모두 189개이다. 우선 4각형 나무토막 여섯 개를 던져 나온 큰 숫자를 합한 숫자를 구한다. 이를 세 번 반복하여 합친 숫자에 해당하는 점괘를 간자에서 뽑는다. 첫 번째 나무토막은 1, 2, 3과 공백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두 번째 나무토막은 4, 5, 6과 공백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런 순서로 여섯 번째 나무토막은 16, 17, 18과 공백으로 구성되어 있고 각 나무토막의 최고 숫자인 3, 6, 9, 12, 15, 18을 합하면 63이 된다. 만약 같은 63이 세 번 반복된다면 총합은 189가 된다. 점을 칠 때의 점괘는 대부분 숫자에 따라 다르게 나온다.

윷놀이의 기원은 고조선의 5가 행정 관제에서 비롯되었으며 글자 자체는 사람의 형상을 닮았다. 척자점과 같은 몇 종의 윷점이 생겨났다. 난중일기에도 이순신장군이 척자점 등을 친 기록이 17회나 등장한다. 좀처럼 모험을 하지 않고 이길 수 있는 전투만 철저히 준비하는 성격인 그가 노심초사하며 점을 치는 모습을 상상해보니 숙연함을 금할 길 없다. 나라에 대한 충성과 휘하 장졸의 생명을 책임진 장수로 두려움과 불안감에 자주 발병하면서도 새벽에 홀로 점을 쳤을 것이다. 점찰경과 윷점의 상관관계는 단정할 수 없지만 윷을 세 번 던져 64괘 중 하나를 얻는데 점괘가 좋지 않다고 해서 여러 번 반복해서는 안 된다. 도구를 이용하고 점괘가 있는 것은 산가지를 이용하는 주역점에서 파생되었을 것이다. 공자도 즐겨 주역점을 쳤고 스위스의 심리학자이자 정신과 의사인 칼 구스타프 융도 주역점을 쳐 환자를 보았다.

금산사

점이 미신이니 혹세무민이니 하는 세간의 인식은 일제시기를 거쳐 특정종교를 기반으로 한 서구문물이 물밀듯 들어오면서 부터이다. 현대의 점복문화는 민간신앙으로 주로 무속인의 영역이 되었듯이 점찰경이나 척자점 등은 사라진지 오래다. 필자는 점복의 기원에 대해서 은상시기 갑골문에 점친 내용을 거북 껍질과 소뼈에 새긴 점사로 본다. 삼국지 위서 동이전 부여조에는 전쟁 전 소를 잡아 제사를 지내고 발톱이 붙어 있으면 길한 것으로 해석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시대에 따라 천문, 지리, 역수, 점복, 명과학 등을 담당하는 관상감, 서운관 등의 국가기관이 존재했다.

융은 점의 원리를 동시성 이론으로 설명하였는데 당사자의 부도덕한 생각과 감정, 원초적인 본능을 포함한 무의식이 반영된 필연의 총합이라는 것이다. 결과에 대한 적중률을 측정할 방법은 없는 것 같다. 굳이 바넘효과 등 심리적 요소가 아니더라도 믿고 안 믿고는 당사자의 마음이 아닐까? 다만 이 분야에 업을 삼고 있는 사람들의 일부가 절박함을 미끼로 혹세무민하는 사행행위를 각자 구분할 정도는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금산사

▲진표율사 소년기와 개구리 이야기(윤재민 (주)RNS 대표, 신지식장학회 청년국장)

김제의 지평선이 보이는 드넓은 평야와 둘레가 일천팔백보나 되는 벽골제에서 자연의 만물을 만끽하고 생명체 대한 호기심으로 가득하여 천방지축으로 뛰어다니는 유년시절의 진표율사가 보인다.

11세가 되는 봄날 산에서 사냥을 하다 개구리를 잡아 버들가지에 꿰어 물에 담가 두고 산에 가서 사냥하다가 집으로 돌아가는 바람에 개구리 일은 잃어버렸다.

해가 지난 다음 해 봄에 그곳을 찾아가 가서 보니 개구리들이 버들가지에 꿰인 채로 울고 있었다. 크게 놀란 진표는 뉘우치고서 내가 어찌 먹기를 위하여 해가 넘도록 이렇게 개구리들에게 고통을 받게 하였는가 하고 모두 풀어준다.

이때부터 어린 진표율사는 모든 것이 궁금해지기 시작한다.

생명이란 무엇인가? 왜 태어나서 죽는 것일까?

이런 고민속에 방황하다 어떻게 산을 넘고 내를 건넜는지 자신도 모르게 달려 어두워서 어느 사찰에 당도하니 그 사찰이 바로 미륵사상의 본원인 금산사였다.

후에 출가하여 변산의 부사의방장으로 간다.

어릴적 한번쯤은 개구리나 메뚜기, 귀뚜라미 등의 나약한 생명체를 장난삼아 묶고 매달고 장난치다 고통을 주거나 죽게 만드는 경험은 있을 것이다.

진표율사는 자신이 지은 작은 업보를 통해 생명과 죽음에 의문을 갖고 수도의 길로 들어서는 계기가 되어 금산사를 중창하여 신라시대 오교구산문(五敎九山門)의 하나인 법상종(法相宗)을 창종하여 중생교화에 크게 공헌하고 오늘날 존경받는 큰 스님이 되신 것이다.

금산사

▲진표율사의 진정한 수행자 모습을 되짚어 보며(김주원 뱅기노자 대표·교사)

전주 완산주(지금의 만경)에서 태어난 진표는 어린 나이에 개구리 사건을 통해 생명의 존귀함을 깨닫게 되어 출가를 결심하게 되었고 이 결정은 불교 역사에서 시대를 뛰어넘는 명승의 출현을 예고하는 울림이 된다.

진표는 12세에 금산사 숭제법사의 문하로 출가하여 15여 년 동안 전국을 돌며 불법을 공부하였고 이윽고 변산의 능가산 의상봉 동쪽 절벽 중턱에 불사의방(不思議房)을 마련하고 수기(受記)를 받기 위해 혹독한 수행 했다는 것으로 유명한 일화가 남아있다.

법명 뒤에 율사(律師)가 붙여진 이유는 살을 도려내고 뼈를 깎는 듯한 고통을 겪으며 수행을 마친 스님에게 붙여지며 승려의 규율을 엄히 감독하고 유지하는 역할을 담당하고, 역사적으로 볼 때 가장 혹독한 수행을 하신 분이 진표율사라고 잘 알려져 있다. 변산의 불사의방, 망신참법(亡身懺法) 등 잔인하리만치 힘든 참회의 수행을 견뎌내는 행적으로 익히 알 수 있다.

능가산에서 수행을 마친 진표율사는 미륵보살로부터 ‘점찰경’, 간자 189개를 받아 중생 교화를 위한 발걸음을 옮겨간다. 속리산 등지를 거쳐 금강산에 들어와 두루 살펴보고 난 진표는 발연소골의 경치도 좋고 절터로써 손색이 없음을 알고 발연사를 창건하게 된다.

그 후 진표율사는 어떤 느낌이 있었나 보다. 자신이 걸어왔던 길을 다시 되짚어 고향 땅으로 향하며, 부모님을 경치 좋고 물 맑은 금강산 자락 발연사 근처로 모시고 올 결심을 하게 된다. 교통수단이 발달 되지 않은 시대에 먼 길을 가기에 어려움이 많았을 것이다. 더군다나 진표율사가 창건한 절터는 모두 험준한 산골에 있었을 것인데 짐승으로부터 위협도 받았을 것이고 먼 거리를 느릿느릿 걷는 두 분을 등에 업기도 하면서 얼마나 많은 시간이 소요되었을까!

금강산에 모시고 얼마 후 아버지는 돌아가시고 어머니는 여자이므로 절간에 모시지 못하고 안새미골에서 사시게 하였다. 효성이 지극하였던 진표는 조금씩 생기는 쌀이 있게 되면 절에서 이십여 리 떨어져 지내시는 어머님께 하루도 거르지 않고 밥을 지어 봉양하였는데 이때 넘나들던 고개를 ‘효양(孝養) 고개’라고 부르게 되었다.

진표의 효성과 관련하여 또 다른 전설도 있다. 발연사 부근에 제석 불상을 새긴 큰 바위가 있는데 그 아래쪽 작은 구멍에서 하루에 한 되 정도의 쌀이 흘러나왔는데 진표의 효성에 감동한 부처께서 배려했다는 것이다. 이 커다란 바위는 ‘재미암(在米巖)’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다.

진표율사께서는 금강산 발연사 동쪽으로 큰 바위에서 수행하던 자세로 입적하셨고 그의 제자들은 입적하신 스승의 신체 형상이 사라지고 뼈만 남았을 때 잘 모아 흙으로 덮어두었다고 한다. 진표율사의 수행 과정과 살아오신 행적은 너무도 훌륭하여 쉽게 따라하기 어려운 점이 많았는데 특히 입적할 때 모습은 불교계에서도 모범으로 삼아 후손에게 널리 회자되고 있다. 요근래에 큰 스님 한 분이 입적하셨다는데 진표율사의 모습과 너무도 달라 불교 신자가 아닌 나에게도 씁쓸함이 남는다.

시대를 거슬러 위대한 분이 어찌 그리 쉽게 나오겠는가!

<기획취재팀>

▲취재기자단

△이방희 제2사회부장(부국장/팀장)

△조원영 기자(제2사회부/김제)

▲자문위원

△박창보 국학박사

△백승기 도시공학박사, ‘무릉도원 상상캠프’ 슈퍼바이저

△김주원 (주)뱅기노자 대표, 교사

△고혜선 전 권번예술원 대표, 한옥마을사람들 대표

△고개희 전사들 사무총장, 교보생명 신논현지점장

△신동만 나그네연맹 회장

△윤재민 (주)RNS 대표, 신지식장학회 청년국장

△김세용 전사들 산악대장

△이주원 디자인 원 대표

 

이방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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