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민숙의 시가 꽃피는 아침] (173) 박형준 시인의 ‘변소에 대한 약사(略史)’
[강민숙의 시가 꽃피는 아침] (173) 박형준 시인의 ‘변소에 대한 약사(略史)’
  • 강민숙 시인
  • 승인 2023.12.03 08:5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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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소에 대한 약사(略史)’

 
 - 박형준 시인
 

 옹기는 뒤뜰 장독대에
 앉아 있는 것만은 아니다.
 허리가 동그란 옹기를 안고 있으면
 어머니를 안고 있는 기분이 든다.
 두툴두툴한 옹기의 촉감이 설운 것도 그 때문이다.
 지붕이 없는 변소에 앉아
 어두컴컴한 땅 밑에 웅크리고 있는
 옹기의 구멍을 내려다본다.
 옹기는 이 집 내력을 알고 있다.
 태어나서 내가 버려졌다는 느낌으로 울었던 것도
 저 밑을 바라보면서이다.
 파묻은 김칫독처럼 발효하는
 옹기는, 저 움푹움푹 팬
 밑바닥에서 깨어져나가며,
 꿈을 꾸고 있을 것이다.
 썩는 것은 따뜻하다.
 지붕 없는 설움으로 떠도는 식구들이
 들락거리며 별과 새와 구름을 보았던 곳,
 나는 이곳에서 태어나서 이곳에서 죽을 것이다.
 

 <해설>  

 이 시는 저를 단박에 어린 시절의 무섭던 시골집 뒷간에 데려다 놓았습니다. 변소는 일상의 공간에서 좀 떨어진 음습한 곳에 자리하고 있어 무서운 귀신이 나올 것만 같았습니다. 장독대에 있을 법한 옹기가 변소에 묻혀있습니다. 그래서 “허리가 동그란 옹기를 안고 있으면/ 어머니를 안고 있는 기분이 든다.”고 합니다. 이는 두툴두툴한 옹기의 촉감이 슬픈 이유이기도 합니다. 

 시인은 “지붕이 없는 변소에 앉아/ 어두컴컴한 땅 밑에 웅크리고 있는” 어둠의 옹기에서 자신의 근원을 발견합니다. 그리고 최초로 “태어나서 내가 버려졌다는” 아픔을 절박하게 깨닫는 공간이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지붕 없는 설움으로 떠도는 식구들이/ 들락거리며 별과 새와 구름을 보았던” 음습한 변소가 생명의 공간이 됩니다. 온 가족의 똥이 모여 썩어가는 옹기는 “김칫독처럼 발효”하고, “저 움푹움푹 팬/ 밑바닥에서” 깨어져 나가는 아픔으로 꿈을 잉태하기 때문입니다. 시인에게 옛적 변소의 옹기는 모태인 동시에 무덤이었습니다. 

 오늘 편안한 변소에 앉아 있으니 고향의 시골집이 그리워집니다. 시골에서 살며 불편했던 모든 기억이 한꺼번에 몰려드네요.
 

강민숙 시인

 강민숙 <시인/문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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