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어서 인물속으로] 한민족 역사문화탐방 (16)고조선 준왕
[걸어서 인물속으로] 한민족 역사문화탐방 (16)고조선 준왕
  • 이방희 기자
  • 승인 2023.11.29 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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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조선의 마지막 불씨가 옮겨지다.

준왕의 천명! ‘내가 한(韓)왕이다’

한인의 아들 한웅은 홍익의 뜻을 품고 신단수 아래 신시 내니
곰네와 범네는 인간 되려고 굴에 들어가 쑥과 마늘을 먹었다.
백일 치성을 드리다가 곰네가 스무하룻만에 웅녀로 화현하여
한웅을 나으시니 이분이 바로 우리민족 시조인 단군 왕검이다.

한인은 하늘의 조화, 한웅은 땅의 교화, 단군은 인간의 치화로
천지인 삼합정신 천부경을 설파하고 366사로 세상을 다스렸다.
사람이 태어나면 스무하루 동안 금줄쳐 단군 후예임을 알리고
만나면 곰네임을 서로알아 곰 왔다고 고맙다 인사하며 살았다.

자연을 경영함에 있어 치우침과 어긋남이 없는 해를 닮았기에
일을 해라(do)하고 해모수 해부루가 되어 아사달문화 열었다.
마음씨 말씨 글씨 솜씨 맵씨 다듬어 혼불로 밝혀 불씨를 내고
조상단지안에 자유 평등 평화의 정신을 담아 역사를 지켜왔다.

단군조선 천이백여 년간, 기자조선 천여 년간 명맥 이어오다
BC 194년에 위만의 공격으로 준왕은 단군네 무리와 남하했다.
뱃길로 한지(韓地)인 금마에 이르러 스스로 한왕이라 칭하니
중국의 한(漢)이 아닌 한(韓)으로 민족의 주체성을 제시했다.

준왕의 남하로부터 마한, 진한, 변한의 삼한시대가 막이 오르고
이로부터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 4국, 다시 3국 시대 열렸다.
한이라 함은 바로 우리가 단군의 후예임을 만천하에 천명으로
홍익인간(弘益人間) 재세이화(在世理化)로 세상 이치 밝혔다.

/백승기 박사
 

 

미륵산
미륵산

▲준왕고(박창보 국학박사)

기자조선의 실체에 대해서는 부정하거나 인정하는 다양한 시각과 학설이 있다. 문헌으로는 상서대전과 사기에 기자의 기록이 처음 나타난다. 동이족 은나라 멸망 후 주무왕에 의해 조선후로 봉해졌지만 신하는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기자가 종선왕거(從先王居) 하였을지언정 일개 망명객이 세력도 없이 광활한 조선을 이어받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조선에서는 동족인 기자에게 요하 서쪽 고죽국이 있던 난하 모퉁이, 또는 대능하 인근을 내주고 장당경과 아사달로 옮긴 것으로 보인다. 이후 부여 등 여러 나라가 조선을 계승한다. 기자는 작은 지역에 웅거하다 점차 세력을 형성하여 이어 갔다. 후대에 연장(燕將) 진개의 침입으로 강역이 크게 축소되었다 회복되는 등의 우여곡절을 겪었다.

40대 기준에 이르러 위만에게 속아 쫓겨났지만 후사도 없이 죽었다는 기록이 있다. 삼국지 위서동이전에는 준왕이 연의 위만에게 나라를 빼앗기고 바다를 건너 한지(韓地)에 거처하며 한왕(韓王)이 되었다고 한다. BC 194년의 일이다. 후한서에는 준왕이 바다로 달아나 마한을 쳐 한왕이 되었다고 하였다. 그러나 그에 앞서 위략과 잠부론에서 한후가 해중(海中)으로 옮겼다고 했고 박물지에서는 바다로 들어가 선국(鮮國)이 되었다고 하였다. 준왕에 대해 사기나 한서에서는 언급조차 없다. 다만 중국(衆國)과 진국(辰國)이 한(漢)과 통교를 희망하였으나 위만이 가로막아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는 기록만 있다.

미륵산성
미륵산성

한지나 해중, 선국이 어디인지 자세히 설명하는 곳은 없으나 고려후기 이승휴가 제왕운기에서 최초로 금마에 비정하였다. 조선시대에 고려사 지리지, 세종실록 지리지, 동사강목, 동국통감, 신증동국여지승람, 강역고, 금마지 등의 기록도 같다. 일명 기준성이라 불리는 익산의 미륵산성(용화산성)은 전설과는 달리 발굴 결과 백제시기에 쌓은 것으로 보인다. 혹은 그 이전 마한세력권에 속해 있었을 가능성이 있고 후일 왕건이 신검의 항복을 받은 장소이기도 하다.

강화도, 경기도 광주 경안, 충남 내포와 직산, 홍성의 금마, 전북 김제와 전주, 전남 영암 등에서도 준왕의 남천을 주장하고 있다. 실제 비슷한 시기로 추정되는 묘제, 토기와 세형동검, 철기문화가 확인되는 지역이 있다.

준왕이 전투가 벌어지고 급히 망명하다 보니 그리 많지 않은 세력이 육지를 통해 멀리 한반도로 이동하기보다 배를 이용한 것으로 보인다. 당시의 선박과 항해술로 보았을 때 연안을 따라 항해하다 서해안의 적당한 곳에 상륙하였을 것이다. 군산 나포까지 배로 이동 후에 내륙으로 향하였다는데 세 아들의 태를 묻었다는 익산 태봉산 태봉사에 준왕의 흔적이 있기 때문이다.

준왕의 후손이라 주장하는 일부 족보에 기씨를 비롯하여 한씨, 선우씨로 바꾼 성도 있다. 평양 숭인전비의 내용도 같다. 아마도 직계후손은 아닌 혈연적 준왕 제사 집단일 것이다. 낙랑 한씨와 낙랑 왕씨의 기자 후손 설 또한 유력한 세력으로서의 조선유민으로 보인다. 삼국지와 후한서에 후손이 끊어진 것으로 기록되어 진위를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고대 일본의 신찬성씨록에 준왕이 일본에 귀화한 마전련(麻田連)의 시조로 보기도 하지만 일고의 가치도 없어 보인다.

미륵산성
미륵산성

진국의 세력과 기존 토착민, 조선유민, 진지망인들이 얽혀 수십 개의 군소 집단이 세력다툼을 하였으니 준왕이 언제 어디서 소멸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삼국유사에는 한지에 이르러 마한을 개국하였다고 하였고 금마설과 여러 족보의 기록으로 보아 일정 기간 잔존세력이 존속하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위만도 왕험성에 도읍하고 3대를 이어오다 우거왕이 살해당하고 BC 108년 한에 의해 멸망한다. 이후 조선유민들이 몇 차례 대거 한반도로 밀려 들어 그들이 간직하였던 선진문화와 앞선 문물이 후대에 큰 영향을 미쳤을 것은 자명한 일이다. 기원전후는 조선, 고구려 등의 맥족과 부여, 동예, 옥저 등의 예족과 삼한이 이합집산하며 한민족의 동일계 원류로서 자리잡은 시기이다.

미륵산서 바라본 익산과 전주
미륵산서 바라본 익산과 전주

 

▲‘취유부벽정기’에 나오는 기자 조선의 공주를 통해 생각해 보는 역사관(김주원 뱅기노자 대표·교사)

송도의 부호 아들로 자라난 홍생이 평양의 영명사 부벽루에 올라 나라를 걱정하며 시를 읊었는데 그 내용이 참으로 진지하다. 또한, 이 소리를 듣고 나타난 천상의 선녀는 은 왕의 후예인 기자 왕의 딸이라 하니 글로써 위대한 역사와 자신의 슬픔을 남기고자 했던 김시습의 유혹을 따라 ‘취유부벽정기’ 소설 속으로 들어가 보기로 한다.

영명심승(永明尋僧)과 부벽완월(浮碧玩月)은 평양 팔경에 속하는데 영명사 부벽루와 관련되어 뛰어난 경치를 자랑한다. 대동강에서 뱃놀이하며 술과 경치에 취한다면 누구라도 시인이 될듯하다.

홍생은 취흥을 이기지 못해 영명사 부벽루에 올라 고국의 흥망을 탄식하며 시를 지어 노래하다 삼경이 되어 돌아가려는데 때마침 좌우에 시녀를 거느린 선녀가 나타나 밤이 새도록 선녀와 아름다운 시를 지어 이야기하며 사랑을 나누었다. 선녀의 말인즉 자신은 기자 왕의 딸로 부왕이 위만에게 왕위를 빼앗긴 후 많은 고초를 겪던 중에 선조께서 내린 불사약을 먹고 수정궁의 상아가 되었다고 소개한다.

미륵산성서 바라본 금마저수지 한반도 모형
미륵산성서 바라본 금마저수지 한반도 모형

홍생이 풍전등화 같은 나라를 걱정하는 것과 오래 전 망한 고조선의 후손 선녀를 만나 사랑을 나누는 내용을 소설 속에 기록한 이유는 무엇일까! 나라를 걱정하는 것은 세조가 단종 찬탈한 것을 슬퍼하는 것이고, 고조선의 후손 선녀를 등장시켜 사랑하는 것은 폐위된 단종을 그리워하며 나라 잃은 슬픔으로 비유했다는 것이다.

우리는 금오신화 ‘취유부벽정기’를 통해 단군 조선, 기자 조선, 위만 조선의 역사를 엿볼 수 있다. 단군 조선이 쇄락해지자 은왕의 후예 기씨가 동쪽으로 내려와 기자 조선을 만들어 기원전 1122년에서 기원전 195년까지 거의 천년의 역사가 지속되었고, 위만 조선(기원전 194년~기원전 108년)에 의해 사라졌다고 한다.

이러한 기자동래설은 삼국 시대에 고구려에서 기자에게 제사를 지냈다거나, 고려 시대에 유교가 통치 이념으로 굳어지며 시원적 존재로 기자에 대한 숭배가 강화되었고 조선 초기에는 단군과 함께 기자가 국조로 나란히 숭상되었다는 기록이 있어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2023년 익산시 야행 당시 기세배 공연

그러나 근세에 들어서 바라보는 시각이 사뭇 다르다. 한민족 최초의 나라 배달국을 계승한 단군 조선의 상고사를 중국과 일본에서 왜곡 날조했다고 주장한다. 즉 동북아를 지배한 황제의 나라 단군왕검의 고조선 역사에 ‘기자 조선’과 ‘위만 조선’의 가짜 역사를 엮었다는 시각이다. 이들이 주장하는 올바른 한국사 체계는 ‘환국 > 배달 > 단군 조선 > 북부여 > 고구려’이다.

수많은 사학자의 주장과 연구 결과가 서로 다른 시각으로 주장을 펴니 이들을 통해 역사를 바라보는 일반 국민의 역사관도 함께 흔들려 혼란스럽다. 물론 다양한 주장으로 활발한 논쟁을 펴는 것도 좋지만 좀 더 명쾌한 역사 체계가 절실하다. 진리도 하나가 아니듯, 시대마다 역사를 바라보는 시각도 달라지므로 자신과 다른 주장에 대한 가능성도 열어두고 연구해 보시길 역사학자에게 간절하게 기대해 본다.

미륵산서 바라본 익산과 전주
미륵산서 바라본 익산과 전주

▲준왕의 남천과 동진(신동만 나그네연맹 회장)

단군조선은 삼한관경제(三韓管境制) 체계로 중앙에 진조선(辰朝鮮)이 우현에 번조선 좌현에 막조선으로 나누에 통치했다. 따라서 요서지역에 번조선이 있었고 기자가 단군이었기 때문에 기자조선이라고도 했다. 준왕은 번조선의 단군이었다.

기원전 2세기 전후 혼란한 중국대륙에서 이주민들이 기자조선의 서쪽 국경에 몰려들기 시작했다. 기자조선의 준왕은 이주민 위만을 중심으로 정착을 허락하고 변경의 방위책임까지 맡겼다. 그러나, 이주민이 계속 늘어나고 세력이 커진 위만은 은혜를 배신하고 군사를 일으켜 준왕을 몰아냈다. 준왕이 밀려났다고 단군조선 자체가 패망한 것은 아니다. 단군조선의 실제적인 패권은 진조선에 있었고 진조선은 건재했다. 나중에 해모수의 북부여로 그리고 고주몽의 고구려로 계승되었다.

준왕은 따르는 신하들과 백성들을 이끌고 남쪽으로 내려갔다. 신하 중에 최항은 대동강 유역 평양에서 낙랑국(한사군 낙랑군이 아니라 최씨 낙랑국)을 건국하기도 했다. 준왕은 뱃길로 남쪽으로 내려오다 이천(利川) 땅인 서아성(徐阿城) 지방에 잠시 정착했었다가 다시 남쪽으로 내려갔다. 이때 이천 서씨(徐氏)가 생겨났다고 한다. 중국의 사서들은 준왕이 배를 타고 한의 땅에 와서 한왕(韓王)이 되었다라고 말하고 고려사와 제왕운기 등에서는 준왕이 도착한 남쪽에 대해서 익산 금마지역이라 꼭 찍어 말한다. 유물도 청동기시대와 초기 철기시대의 유물인 세형동검과 각종 토기가 많고 특히 한반도 유일의 청동거울이 미륵산 서쪽 오룡리에서 출토되기도 했다.

2023년 익산시 야행 당시 기세배 공연

준왕은 북으로 미륵산과 용화산이 병풍처럼 두루고 남과 서로 넓고 비옥한 호남평야가 끝없이 펼쳐진 한반도 최고의 길지에 터를 잡았으리라. 미륵사지 인근이나 사자암 아래 어디쯤 아니면 기준성이라 불리는 미륵산성 아래 어디엔가 왕궁을 짓고 기자조선의 부활을 도모했으리라.

준왕의 초기 정착에는 난관이 많았을 것이다. 마한은 54개 소국이 있고 익산 지역엔 강력한 건마국(乾馬國)이 있어 토착세력에 의한 끊임없는 공격이 예상된다. 결국 분쟁이 없는 새로운 땅으로의 개척이 필요했다. 북쪽과 서쪽과 남쪽엔 이미 강력한 토착세력이 정주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동쪽 산악을 넘어야 했다. 고산에서 대둔산 이치를 넘으면 금산이고 소양에서 웅치를 넘으면 진안이다. 금산도 고대왕국이 들어 설 수 있는 좋은 입지이고 진안의 마령과 백운벌에도 고대왕도가 있을 만한 터이다. 다시 동으로 전진하면 무주가 나온다. 무주 안성벌은 덕유산 서쪽에 높은 산으로 둘러싸인 고원 분지다. 또한 넓고 비옥한 충적평야라 소국의 왕도로 손색이 없다. 여기서 북으로 삼도봉을 넘으면 김천이고 동으로 덕유산을 넘으면 가야산이다.

김천에는 감문국(甘文國)이 있었으나 신라에게 패망하며 역사가 지워졌다. 고대사의 가장 큰 미스터리 중 하나는 가야의 건국이다. 여러 건국신화가 있지만 최치원의 <석이정전>에 의하면 가야산신 정견모주(正見母主)가 천신(天神) 아비가지와 감응하여 아들을 낳으니 장남은 대가야를 차남은 김수로왕으로 금관가야를 건국한 것으로 나온다.

북방의 앞선 철기문화의 선진기술를 가지고 온 준왕과 그의 후손들은 9대 176년 동안 마한의 왕으로 역사를 이어오다 백제에게 병합되었다. 준왕의 후손은 ‘청주한씨세보’에 따르면 마한 8대 원왕(元王)의 세 아들 우평(友平), 우량(友諒), 우성(友誠)이 각각 태원 선우씨(太原 鮮于氏), 청주 한씨(淸州 韓氏), 행주 기씨(幸州 奇氏)가 되었다고 한다. 이천 서씨와 함께 4개 성씨로 혈통이 이어져 온 것이다.

 

<기획취재팀>

▲취재기자단

△이방희 제2사회부장(부국장/팀장)

△김현주·문일철 기자(제2사회부/익산)

 

▲자문위원

△박창보 국학박사

△백승기 도시공학박사, ‘무릉도원 상상캠프’ 슈퍼바이저

△김주원 (주)뱅기노자 대표, 교사

△고혜선 전 권번예술원 대표, 한옥마을사람들 대표

△노기환 전 백제왕도 핵심유적 보존 관리사업 추진단 학예연구관

△고개희 전사들 사무총장, 교보생명 신논현지점장

△신동만 나그네연맹 회장

△윤재민 (주)RNS 대표, 신지식장학회 청년국장

△김세용 전사들 산악대장

△이주원 디자인 원 대표

 

이방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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