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어서 인물속으로] 한민족 역사문화탐방 (15)논개
[걸어서 인물속으로] 한민족 역사문화탐방 (15)논개
  • 이방희 기자
  • 승인 2023.11.22 16:0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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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엄한 생명력! 논개 진주성에서 강토를 지켰다.

촉석루 논개의 혼불! 의사로 추앙해야 마땅
 

우리는 민족된 양심과 인간 존엄의 생명의식을 버리지 않았고
얼차린 어른 되는데 게으르지 않았기에 각성된 오늘에 이른다.
국민이 곧 국가라는 신념으로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지켜내며
민족의 발전을 위해 한발씩만 더 나갈 것을 다짐하게 되었다.

조상들은 언덕마다 거친 숨 몰아쉬며 맨발로 역사강 넘어왔고
논개는 고귀한 손가락에 가락지 맞물려 조국의 강토 지켜냈다.
인류는 인간이 인간의 정복대상으로 침략방어자가 영웅되었고
역사 지킴이 영웅상을 내세워 국가 위상을 높이는데 주력했다.

역사는 중국의 사대주의와 일본 식민사관으로 좌우 분열되었고
열강의 국제주의에 편승하며 민족관은 정립할 여유마저 없었다.
여과되지 못한 외래 문화와 거부하지 못한 다종교 시대를 통해
국적없는 문화공백을 거듭하며 생활철학은 뿌리 내리지 못했다.

도덕의 혼동은 지역갈등과 역사발전의 침체를 감당해야만 했고
윤리의 미비와 강제 단절되었던 역사의식은 희미한 가로등이다.
개인이기와 인명천시 풍토로부터 해방되어 윤리도덕 앞세우고
홍익인간 실천으로 공존공영의 복지공민사회를 조성해야 한다.

분단된 영토를 되찾아 국토 통일과 이데올로기로 동서 양분된
사상과 사유를 찾고 사물을 직시하며 지성체를 도모해야 한다.
올바른 민족사관위에 성숙된 여건을 움켜준 우리가 한 발씩만
앞서 나간다면 새역사를 펼쳐내는데 무슨 일인들 못하겠는가?

/백승기 박사

 

논개 영정
논개 영정

▲양귀비꽃과 석류보다 더 붉은 논개(박창보 국학박사)

  1574년 전라도 장수생인 그녀의 이름은 논개이다. 아들을 잃고 늦게 딸을 본 부친이 4갑술(甲戌)의 보기 드문 간지동체격(干支同體格)이라 개를 낳았다는 음차를 빌어 한자의 뜻과는 달리 논개(論介)로 이름 지었다 한다. 훈장인 부친이 언뜻 보아도 여장부의 사주팔자에 대범함과 직관력이 있고 강직한 성품이었을 것이다. 다소 특이한 삶이나 인생행로를 경험할 수 있을 것이니 이를 염려하여 천한 이름을 지어주었다 한다. 오래 살라는 의미인데 여식에게 개똥이, 돼지 등으로 막 부르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명석하고 재주가 있으며 용모가 아름다웠을 그녀가 어려서 부친을 여의고 숙부의 집으로 옮겨 가 살았다. 그녀를 눈여겨보던 고을의 한 부호가 민며느리로 삼고자 하였으나 모친의 고향 경상도로 피신하였는데 숙부에게 지불한 쌀 50석의 송사가 걸리게 되었다. 일종의 사기죄였을 것이다. 이때 장수 현감이었던 최경회가 억울함을 인정하여 무죄를 선고하고 오갈 데 없는 모녀에게 현청에서 살게 배려하였다. 이후 승진하는 부임지마다 데리고 다녔을 것이다.

논개사당 앞
논개사당 앞

  나이가 차 시집갈 때가 되자 부인과 사별한 최경회가 논개를 후처로 맞이하였다. 무려 42살 차이라 당시로서는 증손녀뻘이었을게다. 호사다마라고 최경회가 모친상을 치르기 위해 고향 화순으로 낙향하였다. 3년상 기간에 임진란이 발발하자 장수로 돌아왔다. 의병장으로 싸움을 준비하는 동안 부부는 잠시나마 행복을 누릴 수 있었다. 이후 전라도 일대에서 왜군과 맞서 싸우며 진주대첩에서는 임계영과 함께 성 밖 왜군의 후방을 기습 공격하였다. 승리를 이끈 진주목사 김시민이 왜군이 쏜 총탄에 맞아 1592년 11월 향년 39세로 순국하였으니 아까운 장재를 또 잃었다.

  이듬해인 1593년 7월 경상도 병마절도사로 임명된 최경회가 2차 진주성전투에 참가하여 패함으로서 남강에 투신해 자결하였으니 꼭 환갑이 되는 해이다. 이 시기에 명, 일간의 휴전과 강화회담 중이었는데 유리하게 이끌기 위한 무력시위와 진주대첩에 대한 보복의 성격을 가지고 10만의 왜군이 진주성으로 몰려왔다. 진주대첩에 참여했던 곽재우 등도 열 배나 되는 왜군의 군세에 포기하고 물러났다. 풍신수길의 명령이라 어쩔 수 없이 공격 시늉이라도 내려 했던 왜군과 싸워서 이길 가능성이 없으리라 판단한 명의 만류에도 조선군이 끝까지 항전한 이유는 오로지 전라도를 지키기 위함이었다.

촉석루
촉석루

  9일간의 전투 중 김해부사 이종인이 친구사이인 충청병사 황진의 시신을 수습하였고 이튿날 본인도 전사하였다. 같은 날 황진의 사형인 최경회와 의병장 김천일 등 몇몇 장수들이 중과부적으로 성이 함락되자 남강에 몸을 던진다.

  성에 남아있던 조선군과 백성이 몰살당하고 왜군의 승리를 자축하기 위한 축하연이 열리던 날 기생으로 위장한 논개가 왜장을 유혹해 끌어안고 남강으로 뛰어들었다. 남편을 따라 못 다한 충의를 다한 셈이다. 방년 19세의 꽃다운 나이에 어느 누구도 해내지 못한 인생행로였다. 그런 의미에서 의사로 추대하자는 의견에 동의한다. 변영로의 시구처럼 양귀비꽃과 석류보다 더 붉은 일개 연약한 아녀자의 충의에 왜군도 더는 어쩌지 못하였을 것이다. 결국 전라도 공략을 포기하고 물러남으로서 임진란은 조선의 승리로 돌아갈 수 있었다.

  만약 황진의 작전을 따라 성 밖에 매복하여 내외 호응을 하며 전략적으로 유연하게 대처하였더라면 장수들과 논개의 죽음은 면할 수 있었을까? 아마도 논개는 부친의 바람처럼 평범하게 행복한 삶을 영위하였을지 모른다. 의암이라는 글씨를 써서 바위에 새길 필요도, 의기사를 세워 추모할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아! 무능하고 어리석은 군주의 통치와 문관이 지휘하는 군대체제는 시대를 넘어 두고두고 탄식으로 남는다.

 

논개 생가
논개 생가

▲주논개! 진주성 촉석루에 잠입하여 적장 끌어안고 남강에 투신하다!(김주원 뱅기노자 대표·교사)

임진왜란 진주성 전투에서 의롭게 죽어간 의암 주논개를 찾아 장수에 이어 진주를 방문하던 날, 맑으나 하얀 구름과 먹구름 조금, 그리고 바람이 불어 추위를 느꼈다. 학창 시절 수학여행지로 잠깐 다녀왔던 곳인데 역사 기행 팀으로 다시 와 역사를 들어보니 감회가 새롭다. 논개가 순국한 지 30여 년 뒤 함경도 의병장의 아들 정대륭이 의암(義巖)이라는 글씨를 바위에 새겼으며, 그로부터 30여 년 뒤 조정에서 파견된 오두인이 의암이라는 글자를 보고 촉석루에 의암기(義巖記)를 지었다. 1721년에 경상우병사 최진한이 의암 사적비를 의암 바로 위에 세워 그 뜻을 기렸다. 이러한 기록을 볼 때 나라를 지켜내고자 했던 주논개의 충절을 잊지 않고 기억하는 후손이 대견스럽다.

1591년 무장현감으로 부임하는 최경회의 나이가 환갑을 바라보는 나이였고, 최경회를 따라나선 주논개의 나이는 겨우 18세였으니 전쟁터를 향해 나서는 발걸음이 얼마나 두렵고 힘들었을까 생각하니 참으로 가여웠다. 1593년 최경회가 경상우도 병마절도사로 승진하여 진주성 싸움에 참가하게 되면서 주논개는 진주성과 인연을 맺게 된다.

촉석루
촉석루

진주성 전투는 1592년 10월에 진주 목사 김시민이 3천 8백여 명의 관군, 의병으로 왜군 2만 대군을 이끌고 오는 나가오카 다다오키를 상대로 7일간의 격전 끝에 승리를 이룬 1차 전투가 있었고, 1593년 6월 19일부터 6월 29일까지 벌어진 2차 전투가 있었다.

진주성 2차 전투는 이미 승세가 기울어진 왜군이 명나라와 협상하며 퇴각로를 확보하기 위해 벌인 전투였다. 왜군은 3만 7천 명의 대군이 조총이라는 신식무기를 지니고 있었고 조선은 관군 3천 4백여 명과 진주성 내에 있던 농민, 아녀자, 노인 등을 합쳐 6만여 명이 있었는데, 이들이 전투를 벌였으니 처음부터 불을 보듯 뻔하게 조선군의 열세였다. 많은 의병이 진주성을 도우러 왔다가 승산이 없다고 판단하고 돌아갔다고 한다. 10일간의 치열한 항쟁을 하였으나 진주성 내에 있던 사람들이 몰살되었고 이 전투에서 최경회는 전사하게 된다. 다만 위협이 되지 않고 시중 들만한 관기만을 남겨두었는데 여기에 주논개가 관기 신분으로 위장하여 진주성에 살아남을 수 있었다. 자신을 살려주고 보호해 주던 남편 최경회를 하루 아침에 잃게 된 주 논개는 원통하고 하늘을 바라볼 염치가 없어 마음속으로 복수의 칼을 갈며 기회를 엿본다.

촉석루
촉석루

왜군은 승리 축하연의 준비를 관기들에게 맡겼으며 호시탐탐 복수의 기회를 엿보던 주논개는 관기 신분으로 살아남아 축하연을 벌이는 촉석루에 잠입한다. 촉석루에 참석한 왜군 장수들은 승전의 기쁨에 들떠 전투에서 몸을 보호하기 위해 입었던 갑옷을 벗어놓고 술과 음악, 맛있는 음식에 한껏 빠져들어 밤이 깊은 줄 모르고 여흥을 즐긴다. 술에 취해가는 적장들과는 다르게 영민한 주논개의 눈은 왜군의 적장 중 게야무라 로쿠스케를 주시한다. 게야무라는 일본 쇼군의 부장으로 승승장구하던 사무라이로 ‘신의 칼’이란 별명을 가진 자로 전투의 승리에 한껏 취해 있었다. 주논개는 게야무라에게 술을 깨기 위해 남강에 내려가 산책하자고 제안한다. 게야무라는 한낱 관기에 불과한 주논개를 의심하지 않고 비틀비틀 함께 강을 향해 내려간다. 남강은 그해 6월에 한차례 내린 비로 강물 수위가 많이 높아 있었는데 이를 염두에 둔 주논개의 계략이 있었다. 많이 취한 게야무라가 몸을 비틀거리자, 이를 부축한다는 명목으로 적장을 끌어안게 된다. 주논개의 양 손가락에는 여러 개의 반지가 끼여져 있었고 양손을 깎지끼니 빠지지를 않는다. 적장과 단단히 묶여진 듯하니 주논개는 엄지발가락에 온 힘을 모아 강물을 향해 밀었다. ‘풍덩’ 소리가 나고 불어난 남강은 두 사람을 삼켜버렸다. 깊은 어둠에 정적만이 흐르다가 한참 후 여기저기에서 왜군들의 소리가 요란하다. 횃불을 강물에 비춰보고 야단법석을 쳐도 그 누구도 시커먼 남강물에 뛰어들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렇게 적장을 끌어안고 주논개는 마침내 남편 최경회의 복수를 할 수 있었다.

전투에서 패배하였으나 남편의 원수를 죽이고 나라를 지키겠다는 주논개의 갸륵하고 드높은 기개를 흠모하고 기리며 기억하자! 양반의 피를 물려받은 여인으로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숙부의 손에 팔려 험한 꼴을 당하다가 최경회라는 은인을 만나 귀한 인연을 맺고 관기로써 적장을 죽였던 기개 높은 여인, 주논개를 높이 찬양하자!

 

촉석루
촉석루

▲논개와 최경회 장군(신동만 나그네연맹 회장)

논개(論介)는 전라도 장수현 출생으로 양반인 아버지 주달문(朱達文)과 어머니 밀양 박씨 사이에 태어난 반가(班家)의 딸이다. 장수군 장계면 의암로 558(대곡리 708)에 생가터가 잘 보존되어 있다. 아버지의 이른 별세로 숙부에게 의탁하여 살다가 송사에 연루되어 고초를 겪었다. 장수현감 최경회의 도움으로 난관을 극복한 논개 모녀는 관저에 의탁하여 살게 되었다. 처음에는 투병 중인 최경회 부인의 병시중을 들다가 후일 부인이 죽고 논개가 성인이 된 후에 후처(後妻)가 되었다.

남편 최경회(崔慶會) 장군은 전라도 능주(화순) 출신으로 양응전, 기대승에게 수학하였고 35세에 과거(科擧) 문과 중 을과에 장원급제하였다. 성균관 전적, 사헌부 감찰, 형조 좌랑에 이어 옥구, 장수현감을 역임하였다. 논개는 장수현감 때 인연으로 부부가 되었다. 무장현감, 영암군수와 영해부사를 역임했다. 담양부사 때 모친상으로 관직을 내려놓고 고향에 돌아와 3년상을 치르다 임란을 맞이했다. 형제들과 합심하여 500여 명의 의병을 모으고 조카 최홍재로 하여금 고경명 장군 휘하에 합류하여 금산전투에 참전케 했다. 고경명 장군이 전사하자 최경회 장군이 의병장으로 추대되었다. 금산과 무주에서 왜병과 싸웠고, 경상도 지역의 구원요청에도 기꺼이 응해 1차 진주대첩의 중요한 기여를 하였다. 그 전공으로 이듬해 경상우도 병마절도사(慶尙右道兵馬節度使)가 되었다.

촉석루
촉석루

2차 진주성전투가 시작되자 최경회 장군은 순성최고책임자(巡城最高責任者)가 되었다. 그는 젊고 용맹하며 병법과 전투에 능숙한 충청병마절도사 황진 장군에게 실제적인 지휘권을 맡겼다. 8일간의 처절한 항전 끝에 황진 장군이 전사하고 다음날 진주성도 함락되었다. 최경회 장군도 결국 남강에 투신 자결하였다. 경상우도 및 충정도 관군 6,000명, 전라우도의병장 김천일 장군 전라좌도 의병장 고종후(고경명 장군의 장남) 장군과 전라도 의병 그리고 경상도 의병 2,800명, 진주성의 백성들과 피난민 2만 4,000명 등 3만 여명의 고귀한 인명이 전원 순국하거나 학살당했다.

전투가 끝난 후 왜군은 촉석루에서 승전 축하연을 열었다. 논개는 진주성 순성최고책임자인 경상우도 병마절도사의 부인으로서 국가의 원수이자 남편의 원수인 왜군을 그대로 둘 수 없었다. 기생복(妓生服)으로 갈아입고 촉석루 아래 의암에서 왜군 장수를 안고 남강에 투신 순국하였다. 19세의 젊음을 충(忠)과 열(烈)로 산화(散花)한 당대의 의인(義人)이다. 그녀의 호칭도 이제 바로잡아야 한다. 논개는 기생이 아니다. 어엿한 신안 주씨의 양반이며 그녀의 남편 최경회는 살아서는 종2품 경상우도병마절도사 사후에는 이조판서에 추증되고 정려되었으며, 선무원종공신 1등에 녹훈되었다가 뒤에 종1품 좌찬성으로 추증되고 충의공(忠毅公)의 시호를 받았다.

따라서 정·종1품 문무관의 부인에게 내린 작호 정경부인(貞敬夫人)으로 불러야 한다. 의로운 기생 의기(義妓) 논개가 아니라 의(義로)운 열사(烈士) 의로운 지사(志士) 의사(義士)이며 좌찬성 충의공 최경회 장군의 정경부인 신안 주씨(朱氏)다. 

<기획취재팀>

▲취재기자단

△이방희 제2사회부장(부국장/팀장)

△송민섭기자(제2사회부/장수)

▲자문위원

△박창보 국학박사

△백승기 도시공학박사, ‘무릉도원 상상캠프’ 슈퍼바이저

△김주원 (주)뱅기노자 대표, 교사

△고혜선 전 권번예술원 대표, 한옥마을사람들 대표

△고개희 전사들 사무총장, 교보생명 신논현지점장

△신동만 나그네연맹 회장

△윤재민 (주)RNS 대표, 신지식장학회 청년국장

△김세용 전사들 산악대장

△이주원 디자인 원 대표

이방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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