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명희문학관_수필가 김순영의 삶과 문학] ⑧매섭고, 유쾌하고, 다정한
[최명희문학관_수필가 김순영의 삶과 문학] ⑧매섭고, 유쾌하고, 다정한
  • 최아현 소설가
  • 승인 2023.11.24 1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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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집 『동(東)이 서(西)에서 먼것같이』를 읽고

무릇 수필이라면 일상적인 언어를 고고하고 부드럽게 조합하여 삶 속에서 발견한 통찰력을 작가의 눈으로 전하는 것. 글이 전개되는 일련의 과정들은 은근하고 유려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 때문에 처음 김순영(1937∼2019)의 수필을 읽었을 때, 당황했다. 능숙하고 정갈한 단어들 사이에서 어딘지 모를 냉철함이 느껴졌다. 살뜰하게 배우고 마주친 것들을 독자에게 차근히 설명하는 수필. 노년에 이른 노련한 수필가의 글을 읽으며 기분 좋게 낯선 깨달음을 얻었다.
 

동이 서에서 먼 것 같이(김순영)
동이 서에서 먼 것 같이(김순영)

○ 딛고 선 자리를 말하다

김순영은 늘 청년 같다. 철길과 도로가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떠나기를 망설이지 않은 사람이다. 수필 속에는 전국 구석구석과 해외까지 마음먹기만 하면 그의 발길이 닿지 않는 곳이 없다. 그의 폭넓은 기동성이 다채로운 사람들을 만나 새로운 영감을 받고 오랜 시간 소화해 신중한 문장을 만드는 주요한 재료가 되었을 테다. 눈으로 맞이하는 아름다움을 이야기하면서도 허투루 쓴 것이 없다. 마치 이때 이 문장이 이곳에 있어야 하는 것처럼 그가 설명하는 세상은 첫 문장에서 마지막 문장까지 매끄럽게 이어진다.
 

화운이라던가요? 꽃구름 속을 차가 달리고 꽃구름은 여전히 우리를 놓아주지 않고 섬진강을 꽃구름에 갇힌 우리를 살포시 안아다가 강물속에 감추는 것이었습니다. 참으로 꿈결인 듯 황홀한 풍경입니다. 우리는 꽃구름에 갇히고 꽃구름은 섬진강에 그림자로 갇혔습니다.

벚꽃은 피어있을 때 아름다운 것은 물론이지만 못지않게 낙화 또한 화려하지요. 아직 생생한 꽃잎이 하나하나 흩날려 떨어지는 모습 또 꽃비로 쏟아져 내리는 모습은 정말 장관이고 일품입니다. 나비떼의 군무 같기도 눈송이 같기도 하고요. 옛날에 보았던 솜틀집에서 날리던 목화솜 같기도 합니다. ∥수필 「꽃의 어여쁨이 보이는 이의 행복」 중에서

수없이 반복되었을 계절과 세상을 둘러보는 그의 시선에서 끊임없는 호기심이 느껴졌다. 그러나 그것이 온전히 처음 보는 이의 설렘은 아니다. 익숙한 풍경에 더불어 그 나름으로 쌓아온 시간이 함께 느껴지는 문장이 연달아 등장한다. 애써 느낄 수 없는 감정을 글을 읽는 독자라면 함께 느낄 수 있을 테다.
 

○ 생각하고 탐구하는 인간

이제는 선뜻 무언가를 새로 배우기가 두렵다. 때때로 잘못을 인정하고 싶지 않아 내 판단과 행동을 그럴듯하게 합리화하기도 한다. 그래서 자주 고집스럽고 속이 좁아지고 있음을 느끼면서도 그런 나를 보며 꾸짖지 못한 것이 못내 부끄럽다. 새해가 되면 잘못은 덮어두지 말고 바로 용서를 빌고, 받은 것이 있으면 용기를 내어 감사 인사를 전해야겠다는 말을 일기장에 쓰곤 하지만, 그 다짐은 늘 무색하게 무너지고 만다. 나와는 달리 수필 속 작가의 용기가 대단하다고 생각하던 차에 때마침 읽게 된 글이 「오해에 대하여」와 「프라하의 천문시계」였다.
 

억울하다는 말은 상대의 오해라는 전제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진실이 아닌 것을 진실로 여기고 있음에 대한 항변이고 해명인 것이다. ‘억울하다.’는 애먼 일을 당해 원통하여 가슴이 답답하다는 것이 사전적 풀이인데 ‘애먼’이란 엉뚱하게 틀리는 또한 애매하게 틀리는 것을 이르는 관형사로 원인이 다른 사람에게 있는데 아무 잘못이 없는 사람이 책망을 듣게 되었으니 분하고 원망스럽다는 하변칙형용사이다. ∥수필 「오해에 대하여」 중에서

내 눈으로 보고 있는 대상과 내가 알고 있는 지식을 전부라고 착각한 오만한 탓? 한쪽에서 바라보면서 보여진 것만을 진면목이라고 우기는 어리석음에서 비롯된 것은 아닌지. 다행히 여정의 절반에서 깨우쳤기에 반타작이나마 할 수 있었지 하마터면 정작 볼 것 아니 보고 영양가 없는 것만 잔뜩 먹어 헛배만 부를 뻔하였다. ∥수필 「프라하의 천문시계」 중에서

작가는 읽는 이의 마음을 예상한 것일까? 그의 질문이 불쑥 책 밖을 걸어 나와 내게도 물었다. 글을 쓰며 호되게 자신을 꾸짖었을 작가를 자주 떠올리며 덩달아 민망해졌다. 정작 질문에 답하기는커녕 처음 책을 읽을 때, 엉뚱하게 작가가 독자를 너무 차갑게 몰아붙이는 것이 아니냐, 하며 오해하고 푸념한 것이 부끄러워졌다. 열렬한 호기심으로 찾아낸 일상적인 글감으로 매섭게 자신을 채찍질하는 그의 글에서 성숙하고 정련된 어른을 만났다.
 

○ 사랑하는 사람, 김순영

책의 막바지에 이르면 작가의 마지막 생애가 자연스럽게 떠오른다. 작가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로 그의 글에서는 감사와 성찰의 향기가 물씬 풍긴다. 행간 깊은 곳에서는 모든 것에 대한 사랑도 느껴진다. 가족들과 주변인에 대한 애정과 배움과 글쓰기에 대한 순애 그리고 그 밖의 모든 것을 바라보는 온정 넘치는 시선이 읽는 이의 곁에 남는다. 「간구」에서는 그런 작가의 모습이 여실히 드러난다.
 

지난 밤에 잠 잘 자게 해주시고 오늘도 생명을 연장시켜주셔서 아무도 살아보지 못한 새로운 날을 살게 해 주신 하나님 아버지 감사드립니다. ∥수필 「간구」 중에서

작가가 글에서 감사하다고 꺼낸 첫마디는 ‘아무도 살아보지 못한 새로운 날을 살게 해 주신’ 것이었다. 그리고 건강한 몸을 감사했고, ‘위로와 격려와 평안을 나누는 대화자’, ‘남을 배려하고 섬길 줄 아는 사람’,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고 가족을 사랑하고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 ‘겸손히 공부하는 것이 재미있는 사람’, ‘교만하지 않은 사람’이 되게 해달라고 간구했다. 여러 차례 책을 다시 읽었을 때, 「간구」가 그의 삶의 태도이자 글을 쓰는 태도라는 사실을 깨닫게 됐다. 「검지는 중지보다 짧다」와 「나이」, 「로마를 생각한다」에서 그의 다짐들이 다시금 눈에 띈다.

또, 주변의 가족들을 사랑하는 것만큼 봄을 사랑한 모양이다. 새로 움트는 것들로 가득한 시기. 그러나 아직은 겨울의 냉기가 가시지 못할 때. 사람을 사랑하는 것을 넘어 손길과 시선이 닿는 모든 것을 사랑한 작가의 마음이 느껴진다.
 

해마다 찾아오는 봄인데 봄날에 봄을 생각하면 짝사랑으로 속앓이를 했던 상대라도 마주친 것 같은 충격을 받는다. (중략) 아침 출근 때와 저녁 퇴근 무렵의 색깔이 다른 四月, 프리즘 쌍안경을 낀 것처럼 가지각색으로 잡히는 황홀한 시야에서 문득 四月과 五月을 자기에게 준다면 나머지 일 년 중 열 달을 모두 내어놓겠다고 한 옛사람의 심정이 이해될 것 같은 봄날이다. ∥수필 「시키지도 않았는데」 중에서

마찬가지로 나도 그의 마음을 깨닫고 충격을 받는다. 매년 찾아오는 봄에도 충격을 받았던 그처럼 나도 그의 수필을 읽으며 내 속을 뒤적이다 놀라고 만다. ‘한 권의 책은 우리 안의 얼어붙은 바다를 깨는 도끼’여야 한다는 프란츠 카프카의 말처럼 이 책은 집필하던 그에게도, 천천히 호흡을 따라가며 읽는 독자에게도 도끼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그가 든 것이 날카로운 도끼날만이 아님을 안다. 끈기 있게 세월을 견디고, 즐거움을 놓치지 않은 김순영의 문학은 매섭고, 살뜰하고, 유쾌하며, 다정하다.

 

최아현 소설가

최아현 소설가

※최아현 작가는 2018년 전북일보 신춘문예에 소설 ‘아침대화’로 등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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