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달보드레한 눈빛의 시학 - 안성덕의 ‘깜깜’
[서평] 달보드레한 눈빛의 시학 - 안성덕의 ‘깜깜’
  • 이병초 시인, 웅지세무대 교수
  • 승인 2023.11.15 16: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좋은 시는 말을 아끼고 그 말씨에 묻어 있는 음색을 아끼며 말과 말이 연결되어 생성되는 가락까지 중히 여긴다. 그러므로 좋은 시는 시적 정황과 관계없는 말이 끼어있거나 시상을 구박함 없이 시냇물이 흐르듯 자연스럽고 간결하다.

  안성덕 시인의 새 시집 『깜깜』(걷는사람, 2023. 11)에 수록된 시편들을 읽으면서 욕심을 베어내는 검(劍)의 미학을 갖춘 게 시라는 생각이 들었다. 잔소리를 제거한 깔끔한 시상들을 속내에 들이면서도 나는 도롱테 굴리던 꼬마가 궁금했다.

  참새 잡는 상황에 기댄 “먼 겨울밤 초가집 처마 끝에 손을 넣고 가만 쥐어 보았던 그 온기”(「비 갠 아침」)가 도롱테 굴리던 꼬마의 눈길로 전이된 까닭이다. 참새에겐 불행한 일이겠지만 꼬마에겐 그 겨울밤에 실물로 잡아보았던 참새 심장의 온기가 요번 시집의 밑그림이자 안성덕 시편들의 한평생 양식으로 작동되었을 것이다.

  시편들에 까락까락 동원된 토속어들, 이 말씨에 묻어 있는 음색도 시의 활력을 돋운다. 됫박, 종재기, 채반, 돌확, 선걸음, 마른세수, 한갓지다, 쏠리다, 까끄라기, 고수레, 무자치, 어둑살, 물팍, 멧내, 두레박, 짚수세미, 조왕신, 옥양목 등에 묻어나는 말씨는 모두가 잊고 사는 옛 정서를 오늘의 욕망으로 해석할 수 있는 틀로 변용된다. 안성덕의 시편들이 확보한 이 지점은 사회현실을 기꺼이 비껴가는 문학주의와 언어가 물질화되다 못해 더러 무례하기까지 한 시의 풍토를 은근히 나무라는 것 같다.

  “돌아앉아 짚수세미로 흰 고무신을 씻는” 청기와집 손주며느리를 훔쳐보았을 꼬마. 시간이 후다닥 지나버려서 그 꼬마가 손녀에게 위로받는 백발의 사나이가 되었을지라도 그의 시편들 곳곳에서 이 꼬마는 시의 상황을 주도한다. 꼬마는 “두레 밥상에 쥐똥 한 상 잘 차려진 집”(「양철 대문 집」)에 살았을 것이고, 빈 우체통에 가득한 ‘햇살 한 통’을 펴보며 “알 품은 어미 딱새의 품새다/ 분명 딱새 새끼 주둥이 같은 노란 소식 들어 있겠다”(「햇살 한 통」)라고 삶의 적막감을 달랜다. 탱자나무 가시로 다슬기 속살을 빼먹으면서, 도토리묵을 양념장에 찍어 한 젓가락 집으면서도 “사는 일, 묵 집듯 바들거렸다고 수시로 묵사발 되었다고는 말하지 않”(「묵」)겠다는 어른 꼬마. 그도 언제부턴가 “빈 지게가 더 무겁다”(「포터 마하리」)라는 사실에 쥐똥과 다슬기와 새끼 딱새의 노란 주둥이와 묵과 묵사발이란 말씨의 음색에 기대어 목메었을 터이다.

  선운사 극락전 처마 끝에 풍경(風磬)으로 매달린 물고기를 응시하는 시의 내면은 살뜰하다. 4차 산업혁명에 개인의 정체성까지 해체당할지도 모른다는 징후를 감지한 듯 “출처를 모르는 바람처럼/ 가는 곳을 모른 채 평생 헤엄치는 저 물고기/ 저를 알고 싶었겠지요”(「바람과 풍경」)라고 말을 건네는 시의 실존적 품은, 모두의 현재를 찬찬히 돌아보도록 유도하지 않는가.

  시의 단단한 내구력을 끼고 도롱테 굴리던 꼬마는 어디에 있을까. 말씨의 음색에 딸린 가락을 몸에 감고 정임이 찾으러 갔을까. 달보드레한 눈빛 건넨 새도 없이 “별이었다가 달이었다가 끝내 티끌이 되어”(「지나간 사람」)서 멀어졌을 정임이. 오늘도 꼬마는 춘포역 빈 대합실에 앉아 “몇 동이나 더 눈물을 쏟아야 너를 들어낼 수 있을까”(「연분암」)라고 제 가슴을 쓸어내리며 “소리 없이 기적이 우”(「춘포역」)는 소리를 듣는지 모르겠다.

 

 글 = 이병초(시인, 웅지세무대 교수)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