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의 독립운동가 - 서상교, 최낙철, 신기철 선생
11월의 독립운동가 - 서상교, 최낙철, 신기철 선생
  • 전북동부보훈지청
  • 승인 2023.11.06 1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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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의 독립운동가

 서상교 선생은 경상북도 대구에서 태어나 대구 남산소학교를 졸업하고 대구상업학교에 재학 중이던 1942년 5월경 김상길·이상호와 함께 항일비밀결사 ‘태극단(太極團)’을 조직하였다. 단원은 모두 26명이었으며, 이들은 민족의식 고취와 학술 연구, 체력 향상 등의 활동에 나서는 한편 전국적인 조직이 완성되면 국내외의 여론을 환기시키고 항일투쟁을 전개하며, 만약 어려울 경우 중국으로 망명하여 군사후원을 받는다는 등의 계획을 수립하였다. 

  그러나 결단식으로부터 불과 2주가 지난 5월 23일 누군가의 밀고로 단장 이상호가 체포되었으며, 그의 집에서 태극단 관련 문서가 발견되어 서상교 등 단원 26명이 모두 체포되면서 본격적인 활동에 착수하지 못한 채 태극단은 와해되었다. 서상교는 단기 5년 이상 장기 7년의 실형을 선고받고 복역하던 중 1945년 해방을 맞아 8월 16일 출옥하였다. 

  최낙철 선생은 전라북도 무주에서 태어나 대구사범학교에 재학 중이던 1941년 1월 임병찬 등과 함께 항일비밀결사 ‘연구회(硏究會)’를 조직하였다. 이들은 조선이 가까운 장래에 반드시 독립할 것이며, 이에 대비하여 각자가 관심 있는 학문을 연구하여 실력을 양성하고 각 방면에서 최고의 지도자가 되는 것을 노력하기로 결의하였다. 회원들은 1941년 2월부터 3월까지 6회의 모임을 갖고 연구결과를 발표하며 민족의식을 고취하였으며, 졸업 후 교사로 부임하면 일제의 패망과 조선의 독립에 대비하여 우수한 조선인 학생에게 이른바 ‘천재교육’을 시행하여 민족의 지도자로 양성하며, 현지에서의 활동을 매월 1회 보고한다는 계획도 수립하였다. 

  1941년 3월 졸업 후 함경북도 나진의 약초공립국민학교에 부임하여 연구회의 활동을 수행하던 최낙철은 같은 해 7월 대구사범학교의 학생비밀결사가 적발되면서 체포되었으며, 1943년 11월 30일 대전지방법원에서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5년의 실형을 선고받고 복역하던 중 1945년 8월 15일 광복을 맞아 출옥하였다. 

  신기철 선생은 강원도 춘천에서 태어나 춘천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춘천고등보통학교에 재학 중 항일비밀결사인 ‘상록회(常綠會)’에 가입하였다. 상록회는 1937년 3월경 춘천고보 남궁대 등이 조선의 독립을 준비할 목적으로 결성하였다. 이들은 1937년 4월 “조선 민족의 해방을 목적으로 하고, 참된 조선인의 양성과 회원의 단결심의 양성 훈련”을 위하여 별도의 독서회를 조직하고 농촌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 

  1938년 가을 상록회가 경찰에 적발되면서 각지의 졸업생을 포함한 137명이 체포되고 이들 중 36명이 검찰에 송치되었다. 이들 중 신기철 등 12명은 1939년 12월 29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2년 6월의 실형을 선고받고 복역하였다.  

  1930년대 중반 이후 침체의 늪에 빠졌던 학생독립운동은 1940년대에 들어와 오히려 활기를 띠게 되었다. 태평양전쟁을 발발한 일제가 점차 수세에 몰리게 되자 일제의 패망과 조선의 독립에 대한 희망이 보였으며, 일제의 탄압과 수탈이 강화될수록 그에 대한 반발도 심화되었다. 민족의 암흑기와 같았던 전시체제기에 학생들은 독립운동의 불씨를 꺼트리지 않기 위하여 자신의 장래와 안위를 돌보지 않고 헌신하였다. 그 덕분에 한국독립운동의 숭고한 정신과 역사는 끊어지지 않고 계승될 수 있었다. 칠흑같이 어두웠던 시기에도 꺼지지 않았던 불씨였기에 학생들의 값진 노고와 희생은 우리 역사에서 더욱 환하게 빛나고 있다. 

  정부는 선생들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서상교, 최낙철 선생에게는 1963년 독립장, 신기철 선생에게는 1977년 대통령표창,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했다.

 
 전북동부보훈지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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