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민숙의 시가 꽃피는 아침] (169) 백석 시인의 ‘적막강산’
[강민숙의 시가 꽃피는 아침] (169) 백석 시인의 ‘적막강산’
  • 강민숙 시인
  • 승인 2023.11.05 1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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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적막강산’  

 - 백석 시인 
 

 오이밭에 벌배채 통이 지는 때는 
 산에 오면 산 소리 
 벌로 오면 벌 소리  

 산에 오면 
 큰솔밭에 뻐꾸기 소리 
 잔솔밭에 덜거기 소리  

 벌로 오면 
 논두렁에 물닭의 소리 
 갈밭에 갈새 소리  

 산으로 오면 산이 들썩 산 소리 속에 나 홀로 
 벌로 오면 벌이 들썩 벌 소리 속에 나 홀로  

 정주 동림 구십여 리 긴긴 하룻길에 
 산에 오면 산 소리 벌에 오면 벌 소리 
 적막강산에 나는 있노라. 

 <해설>

 이 시는 평안도 사투리로 독특하게 고향의 서정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오이밭에 통배추가 속이 차는 때(“벌배채 통이 지는 때”)에 “산에 오면 산 소리/ 벌로 오면 벌 소리”가 요란합니다. 산과 들에서 들려오는 “큰솔밭에 뻐꾸기 소리” “잔솔밭에 덜거기(늙은 장끼) 소리” “논두렁에 물닭의(뜸부기) 소리” “갈밭에 갈새(휘파람새) 소리”에 소박한 고향의 산과 들이 온갖 새소리로 들썩입니다.  

 이런 야단스러운 산과 들에 “산 소리 속에 나 홀로/ 벌로 오면 벌이 들썩 벌 소리 속에 나 홀로“라고, 야단스러운 만큼 “나 홀로”라고 외로운 심경을 토로합니다.  

 집으로 돌아가는 고향길 “정주 동림 구십여 리 긴긴 하룻길”을 걷는 동안 산과 들에서 려오는 소리가 시적 자아에게는 적막강산의 시간입니다. 그래서 시의 마지막 연도 “적막강산에 나는 있노라”며 놀랍게도 역설로 끝을 내고 있습니다. 

 온갖 소음에 시달리는 요즘, 백석 시인의 시를 앞에 두고 있으니 고향이 그립기만 합니다. 벌 소리, 물소리 새소리가 들리는 고향 적막강산 속에서 며칠만이라도 있으면 세상의 시름과 욕망을 좀 털어 낼 것 같습니다. 

강민숙 시인

 강민숙< 시인/문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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