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어서 인물속으로] 한민족 역사문화탐방 (12) 황진 장군
[걸어서 인물속으로] 한민족 역사문화탐방 (12) 황진 장군
  • 이방희 기자
  • 승인 2023.11.01 14:5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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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덕원에서 민족의 불씨를 살려내다!

역사는 변화를 인내하고 감당해야 한다

우리들 마음 속 깊은 곳엔 결코 꺼질 수 없는 민족혼의 불씨가
자리를 잡고 있었기에 온갖 역경에도 불구하고 나라를 지켰다.
국민 한사람 한사람 각기 제 위치에 나라지키는 역군이 되었고
한 민족 얼을 깨워내는 각설(覺說)이 되어 강토를 수호하였다.

우리 민족은 예부터 마음을 주고 받을 때 상대의 가슴에 묻어
싹을 틔우려 마음씨라 했고 그 마음 말로 전하며 말씨라 했다.
글로 쓰면 글씨, 손재주 뽐내면 솜씨, 자태를 내면 맵씨였다.
명보 황진장군은 씨앗중 가장 중요한 불씨 지키고 순절하셨다.

조국의 평화통일 이라는 반드시 성취해야 할 역사적인 소명을
이루기 위해 엄청난 변화를 인내하고 감당해야 할 일이 많다.
인류 평화를 위한 민족의 발전도 개인의 이해나 안일 추구로
발목이 잡혀서는 안 될것이며 도도하게 흐르는 강물이 되자.

동서고금에 유례없는 한강의 기적을 이룬 자부심에 도취되어
스스로 축배를 들고 자축하기에는 아직은 때 이른 감이 있다.
우리는 조국을 위해 무엇을 하고있으며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스스로 고민하고 다 함께 동참하여 역사등대 지기 되어보자.

100여 년 문화공백기 문화 발전을 도모하려는 애국 지사들이
겨레의 가슴에 꺼져가는 불씨를 다시 일으키고 살리려 한다.
혼신을 다해 민족 불씨를 돋아내어 국가 발전의 심지가 되고
기름이 되어 아낌없이 몸과 마음을 다 태워 내야 할 것이다.

/백승기 박사
 

황진 장군 이치대첩비

황진(黃進)은 1550년 남원에서 태어나 1576년 무과에 급제 선전관을 거쳐 이듬해 명나라를 다녀왔다. 1583년에는 여진족이 침입한 니탕개란에서 공을 세운바 있다. 1591년에는 일본에 다녀와 조만간 일본이 조선을 침입할 것이라고 보고했으나 묵살되고 말았다.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해 일본이 한양을 점령하자 전라도관찰사 이광(李洸)이 이끄는 3도 근왕병에 동복현감으로 참가, 5만 군사를 이끌고 북상하여 용인에서 일본군과 싸웠으나 패전하고 말았다. 전열을 정비한 황 장군은 웅치고개를 넘어 전라도로 진격하는 왜군을 웅치 전주 안덕원에서 격퇴한다. 또 권율 장군과 함께 이치전투에서 왜적을 격퇴했다. 당시 1천명의 비정규군이 1만영의 왜적을 무찔러 그 공로로 익산군수 겸 충청도 조방장에 올랐다. 이후 1593년 수원 독산성, 경기도 죽산, 경북 상주 등에서 연승을 거두었다. 뒤이어 왜군이 진주성을 공격하자 김천일, 최경회 등과 함께 진주성으로 들어갔다. 9일간 성을 지키며 용감하게 싸우다 전사했다.

#박창보 국학박사

▲황진 그는 누구인가?

무민공 황진은 1550년(명종5년) 전라도 남원부 주포리 산내촌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장수이며 황희정승의 5대손이다. 어려서부터 영특하였고 날렵하였으며 호탕한 성격에 책임감이 강한데다 말타기, 활쏘기 등의 무재가 있었다 한다. 체격이 크고 수염이 아름다웠다. 비슷한 성향의 이종인과 벗을 삼았으며 결국 생사도 같이 하였다. 실록에 문자를 알지 못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사관의 시각에서는 문신에 비해 무인의 학문 수준을 낮게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선조 9년에 무과에 급제하여 군생활을 시작하였는데 종계변무를 위해 파견한 사신의 군관으로 첫 임무를 수행하였다. 10여년 후인 여진족 니탕개의 난에 토벌군으로 참여하여 공을 세웠다. 제일 앞장서 싸우며 획득한 적의 수급을 동료들에게 나누어주어 두루 포상을 받게 하였다. 이후 부임하는 곳마다 성을 개축하거나 시설을 보완하였다.

선조 23년에 일본의 침략의도를 간파하기 위하여 파견한 통신사의 일행에 종숙부인 정사 황윤길의 군관으로 수행하였다. 이때 왜인들은 기선제압을 위해 무례한 행동을 보이거나 위협적인 태도를 보였다. 가령 길가에 과녁을 세워놓고 50보 밖에서 활을 쏘자 황진이 과녁 옆에 작은 표적을 놓고 백발백중의 솜씨와 더불어 날아가는 새 2마리를 떨궈 버림으로서 납작한 코를 만들어 버렸다. 풍신수길이 통신사 일행에게 환심을 사기 위해 은화를 나누어 주었는데 이런저런 물건을 사는 동안 황진은 왜검 두 자루를 구입하였다. 머잖아 왜군의 침략이 예상되므로 이를 대비하였던 것이다.

귀국 후 일본의 정세에 대해 부사 김성일의 상반된 보고로 인해 전란에 대비하지 못하고 결국 임진란이 발발하게 되었다. 김성일을 참하라는 황진의 상소문이 무산된 것은 집권당인 동인세력을 경계하는 문중의 만류 때문이었다.

분을 참지 못한 황진이 주색을 멀리하고 틈나는 대로 무예연습을 하였다 한다. 마침내 동복현감으로 부임하여 주민들에게는 덕을 베풀고 내성을 쌓아 전시에 대비하였다. 근왕병의 일원으로 참전한 황진이 수원에 복병으로 잠복하는 동안 무능한 지휘관 전라도관찰사 이광이 용인전투에서 패퇴하자 조선군의 병장을 수습하여 병력 손실없이 귀대하였다.

왜군의 침입을 저지하기 위해 남원으로 향하던 황진이 웅치로 회군하는 동안 김제군수 정담이 죽고 나주 판관 이복남과 의병장 황박은 후퇴하였다. 황진이 안덕원에 이르러 합류한 이복남과 황박이 힘을 합쳐 왜군을 물리쳤다. 웅치에서 물러난 왜군이 이치를 넘어 진주성을 점령하려 하자 전라도절도사 권율의 휘하에서 황진이 크게 용맹을 떨쳤다. 이날 황박이 전사하였다. 왜군들도 이치전투를 3대 전투 중 하나로 기록하였고 황진을 가장 두려워하였다.

이후 충청병사로 승진하기 까지 크고 작은 전공을 세웠고 곽재우의 만류에도창의사 김천일과의 신의를 지키기 위해 사형인 의병장 최경회와 함께 진주성전투에 참가하게 되었다. 만약 황진의 의견대로 성 밖에 주둔하는 부대로 나누어 내외로 협공을 하였다면 강으로 둘러싸인 고립무원의 진주성은 함락되지 않았을 것이다. 전투 8일차 시체더미에 숨어있던 왜군이 쏜 총에 이마를 맞은 황진이 전사함으로서 진주성은 함락되고 말았다.

김해 부사 이종인이 황진의 시신을 수습하였고 이튿날 최경회와 자신도 남강에 투신하였으니 사형과 절친이 한 장소에서 생사를 같이 한 셈이다. 후일 최경회의 후처 논개가 왜장을 안고 남강에 투신하였으니 남편의 못 다한 충의를 대신한 셈이다. 이러한 충의에 왜군도 더는 어쩌지 못하고 전라도 공략을 포기하게 됨으로서 조선의 승리로 돌아갈 수 있었다.

웅치대첩비

#신동만 나그네연맹 회장

▲이치·웅치전투

황진(1550~1593) 장군은 장수(長水) 황씨로 황희(1363~1452) 정승의 5대손이다. 남원 주생면 영천리 출신으로 8척 장신에 준수한 외모의 대장부였다. 1576년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을 거쳐 1577년 군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왔고, 1591년에는 조선통신사 황윤길을 보좌하는 무관으로 일본에 다녀왔다. 1592년 임진왜란 당시 전라도 화순 동복현감이었다. 급변하는 국제정세와 왜의 침략을 예견했던 그는 왜란을 대비하여 짧은 시간이지만 군량을 비축하고 병사들을 모아 훈련하였던 것 같다.

삼도근왕병(三道勤王兵)으로 참전한 용인전투에서 대패하여 타병력은 대부분 와해되고 흩어졌지만 황진의 병력은 온전히 보전하여 전라도로 퇴각할 수 있었다. 웅치전투(熊峙戰鬪)에서도 처음 웅치에 배치되었다가 왜군이 남원으로 향한다는 거짓 정보에 남원으로 급파되었다가 다시 돌아와 안덕원에서 웅치를 넘어온 왜군을 기습하고 퇴각하는 왜군을 끝까지 추격하여 대패시켰다. 그리고 바로 광주목사 권율 등이 지키는 이치로 이동하여 전투에 참여하였다. 짧지 않은 거리를 신속히 이동하고 전투에 주도적으로 활약하는 기동성을 봤을 때 황진 장군의 병력은 기병이 주력이었던 것 같다. 현감이니 동원 가능한 병력은 겨우 700명 내외였을 것이다. 웅치전투에서 1차, 2차, 3차 방어선을 무너뜨리고 안덕원(安德院)까지 진출한 왜의 정예부대를 소수의 병력으로 대파한 것을 보면 장군은 병법(兵法)에 능통하고 지휘력이 출중한 것으로 추정된다. 뛰어난 활 솜씨와 용감무쌍한 기상으로 선봉에서 항전하다 총상을 입기도 하는 등 고군분투하며 승리의 결정적 역할을 했다.

이치전투(梨峙戰鬪)에서 승리한 장군은 공으로 익산 군수 겸 전라도 조방장(全羅道助防將/참모장격)에 올랐다. 1593년 2월 전라병사 선거이(宣居怡) 휘하에서 수원전투에 참여하여 척후(斥候)로 최전방에서 적을 만나 모두 후퇴하는 와중 홀로 분투하여 공을 세웠다. 그 공로로 절충장군(折衝將軍) 겸 충청도 조방장으로 승진했고 곧이어 충청도 병마절도사(忠淸道兵馬節度使)에 올랐다. 6개월 만에 오직 구국의 충정과 무공만으로 종6품에서 종2품 도의 군사 최고책임자로 초고속 승진하였다.

이듬해 봄, 죽산산성(竹山山成)에 주둔한 왜의 정예병 4,000여명을 1,000여명의 병력으로 기습공격과 매복작전으로 승리하고 성을 탈환하였다. 퇴각하는 왜군을 끝까지 추격하여 상주에서 대파시켰다.

1593년 6월 21일, 권율, 곽재우, 선거이, 홍계남 등 다른 장수들과 명나라 군사들도 포기한 고립무원의 진주성(晉州城)에 휘하 병력 700명의 이끌고 들어갔다. 김천일 장군의 호남의병들과 화순 출신이면 장수현감을 하였던 논개의 남편 경상우병사 최경회의 병력과 진주성의 병력을 합쳐 6,000여명이었다. 순성(巡城) 최고 책임자가 되어 왜군 정예 10만 명을 상대로 8일 동안의 처절한 항전을 승리로 이끌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성 밖 적의 동향을 살피던 중 시체 밑에 숨어있던 왜병의 조총에 절명하였다. 결국 장군이 순국한 하루 뒤 진주성은 함락당했다.

임진왜란 4대 대첩은 한산대첩, 행주대첩, 진주대첩에 이어 웅치·이치 전투다. 선조수정신록(宣祖修整新錄)에도 일본사람들은 웅치·이치 전투의 패배를 가장 뼈아프게 생각한다고 기록하고 있다.

한산대첩은 이순신 장군과 전라도수군이 주력이었고, 행주대첩은 권율 장군과 전라도의 관군과 의병, 승병이 주력이었다. 조선의 곡창이며 조선 수군 이순신 장군의 배후지 전라도를 지킨 웅치·이치전투도 전라도의 관군과 의병과 승병의 합작품이다. 그래서 이순신 장군은 약무호남시무국가(若無湖南是無國家)라 호남을 칭송했다. 그리고 임진왜란을 종결시킨 마지막 전투가 제2차 진주성싸움이었다. 조선의 거센 저항에 놀라 진주성을 점령하고도 바로 퇴각하여 오랜 소강상태를 유지하다 정유재란으로 이어졌던 것이다.

바다에는 이순신 장군이 있었다면 육지에는 황진 장군이 있었다.
 

#김주원 (주)뱅기노자 대표, 전직 교사

▲웅치(곰티재)와 이치를 다녀오다

임진왜란 당시 전라도를 지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 진안의 웅치(곰티재) 전투지와 대둔산 이치 주전투지를 찾아 임진왜란 당시의 치열함을 느껴보고 싶었다. 그곳엔 변함없이 웅치 전투와 이치 전투, 진주성 전투 1, 2차를 치러낸 명장 황진 장군께서 계셨다.

웅치의 초입에 있는 마을은 힘들었던 전쟁의 상처를 알려주려는 듯 석양빛에 고즈넉하다. 웅치는 전북 완주군과 진안군을 잇는 고갯길로 민가에서 올려다보았을 때 그리 높지 않으나 좁고 험준해 보였다.

많은 관객을 모았던 영화, ‘한산:용의 출현’에 나오는 웅치 전투는 영화 덕분인지 사람들 사이에 ‘육지의 한산 대첩’으로 유명해졌고, 호남을 지킨 임진왜란의 성지가 되었는데 근처에 원불교 성지도 품고 있어서 더욱 그러한 듯하다. 웅치 바로 뒤쪽으로는 익산과 포항 간 고속도로를 건설중이고, 조금 더 위쪽으로는 트레킹과 라이딩·드라이빙의 성지가 되어있었다.

그런데 웅치 전투지를 두고 두 지역 간의 주장이 달라서 ‘웅치 전적지’ 안내판을 두 군데에 세웠다. 진안 문화원에서 곰티재 길에, 완주군에서 덕봉길에 세웠다. 또 다른 곳 적천치 길도 웅치 전투가 벌어졌던 곳이다. 두 곳이든, 세 곳이 되었든 무슨 문제가 있겠는가! 전투가 벌어진 지역이 한정되지 않으므로 전투가 벌어졌던 곳곳에 전적비를 세우자. 그리고 가슴 아픈 역사지만 기록하고 기억하여 교훈으로 삼자!

<기획취재팀> ▲취재기자단

△이방희 제2사회부장(부국장/팀장)

△김성봉 부국장(제2사회부/진안)·배종갑 부장(제2사회부/완주)
 

▲자문위원

△박창보 국학박사

△백승기 도시공학박사, ‘무릉도원 상상캠프’ 슈퍼바이저

△김주원 (주)뱅기노자 대표, 전직 교사

△국선희 선도문화연구원 자문위원, 전 전북대학교 겸임교수

△고개희 전사들 사무총장, 교보생명 신논현지점장

△윤재민 (주)RNS 대표, 신지식장학회 청년국장

△김세용 전사들 산악대장

△신동만 나그네연맹 회장

이방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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