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 현수막 홍수 시대
정치 현수막 홍수 시대
  • 전정희 전북여성가족재단 원장
  • 승인 2023.10.31 1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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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정희 전북여성교육문화센터장
전정희 전북여성가족재단 원장

지난 추석 무렵 거리를 온통 뒤덮었던 현수막들은 대부분 자취를 감추었다. 그러나 아직도 시골 마을 곳곳, 도시의 후미진 곳에는 처리되지 않은 철 지난 현수막들이 그대로 남아 있다. 매일매일 마주치며 그곳을 지나야 하는 사람들에게는 대단한 인내심이 필요해 보인다.

굳이 명절이 아니더라도 국회의원부터 기초의원까지, 현역 정치인부터 예비출마자들까지 선거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사람들은 현수막 정치를 외면할 수 없다. 비용 대비 효용성이 크고, 모두가 하고 있는 그 대열에 동참하지 않을 이유가 없는 것이다.

게다가 지난해 12월, 옥외광고물법이 개정되어 정당 정책과 정치 현안에 대해 별도 신고나 허가 없이도 현수막을 설치할 수 있도록 허용되었다. 무분별한 현수막 정치의 판을 깔아준 것이다. 심지어 요건만 갖추면 지정 게시대가 아닌 곳에도 15일 동안 게시할 수 있게 되었다. 그 결과, 지역민들은 온갖 비방과 막말, 조롱과 비아냥이 가득한 현수막의 홍수 속에서 현기증마저 느끼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지나친 현수막 홍보에 눈살을 찌푸리는 이유 중의 하나는 환경문제 때문이다. 현수막은 소각시 유해물질이 나올 뿐 아니라 플라스틱 재질이라 재활용도 어렵다. 현수막을 수거하여 재활용 물품을 만드는 활동들이 있다고 해도 전체 현수막의 극히 일부분일 뿐이다.

또한 당연히 현수막을 잘 보이는 곳에 걸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대부분 도심 교차로나 유동 인구가 많은 곳에 무분별하게 내걸리고 있다. 보행자의 움직임을 방해하거나 운전자의 시야를 막는 등의 일이 비일비재하다. 시민 안전과도 직결되어 있는 것이다.

지나친 상호비방과 공격은 지역민들의 정신건강마저 위협한다. 날이면 날마다 그런 문구들을 마주하면서 심각한 피로감과 스트레스를 호소한다. 게다가 그것은 정당을 통해 막대한 혈세가 투입되는 일이기도 하다.

미국에 한동안 머물렀을 때 그곳의 선거문화를 경험할 기회를 가졌다. 우리나라처럼 요란한 선거운동도, 거리를 뒤덮는 선거 현수막도 찾아볼 수 없었다. 대신 ‘야드 사인(Yard Sign)이라고 해서 집 앞마당에 작은 팻말들을 꽂아놓고 좋아하는 후보에 대한 지지를 표명하는 정도였다.

미국의 그러한 문화는 1820년대 당시 대선 후보이던 존 퀸시 애덤스가 마당에 지지 팻말을 꽂도록 마을 주민들을 설득한 것이 시초였고, 그 전통이 그대로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땅바닥에 낮게 꽂혀 있어서 유심히 관심을 갖지 않으면 그것이 선거를 위한 팻말인지조차 알 수 없었다. 그마저도 투표소 근처, 도로변, 가정집 마당처럼 게시할 수 있는 장소와 기간을 엄격하게 규정하고 있어서 우리처럼 교통과 보행을 방해하거나 시각적 민폐를 끼치는 경우는 찾아보기 어려웠다.

눈앞의 작은 편익만 추구하면서 법을 개정하는데 동참했던 사람들의 결자해지가 필요하다. 현재 국회에는 현수막 공해를 줄이기 위한 옥외광고물법 개정안이 6건 발의돼 있다. 그러나 통과는 기대난망이다. 달콤한 선전수단으로서의 활용 효과를 이미 만끽한 까닭이다. 골목골목을 누비지 않아도 교차로 한복판에서 환하게 웃고 있는 사진을 곁들인 현수막은 그 자체로 훌륭한 홍보수단의 역할을 해왔다.

그러나 홍보수단으로서의 현수막의 순기능을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거기에 엄격한 규정을 만들고 그것을 준수하도록 법의 집행이 이루어져야 한다. 공무원들의 경우, 정치인들의 현수막을 제거하는 데는 용기가 필요하다. 직·간접적으로 그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제는 한계 상황이 된, 정치 현수막 홍수 시대를 종식시킬 새로운 옥외광고물법을 기다린다.

전정희<전북여성가족재단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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