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어서 인물속으로] 한민족 역사문화탐방 (11)황박
[걸어서 인물속으로] 한민족 역사문화탐방 (11)황박
  • 이방희 기자
  • 승인 2023.10.25 17:0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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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러져 가는 민족혼을 지켜낸 의병장 황박

若無湖南 是無國家

만약 호남이 없었다면 나라가 없었을 것이다

신라는 화랑으로 청소년을 일깨운 진흥교육대왕 역사를 세웠고
고구려는 옛 강토를 최대로 회복한 광개토국토대왕이 건재했다.
조선의 바다는 거북선으로 나라를 지킨 이순신 장군이 있었으며
육지에서는 부친 상중에 출전한 황박(黃璞)장군이 선봉을 섰다.

종교에는 국경이 없으나 의병에게는 지켜야할 조국이 있었기에
국경선 만들고 육지와 바다를 지켜내며 민족 안녕을 도모했다.
국토수호를 누가 시킨다고 할 일이며 대가를 바라며 할 일인가
한번 뿐인 인생 민족의식 고취로 당리당략 역사침탈 막아냈다.

서인동인 당파정권 장악의 재물로서 두 날개를 꺾이고 쓰러지며
선조 등에 밀려나간 이들의 발길에 밟혀 절름발이 조선 되었다.
변명도 재기도 심지어는 보상조차도 외면하며 날개를 잘릴 때에
모진 생명으로 역사 날개 지키겠노라 이치(梨峙)에서 순절했다.

수많은 외침(外侵)에 의한 외래문화로 우리 역사는 왜곡되었고
수입종교로 민족사상 편집되며 생명 구심점인 역사인물도 없다.
급조된 민주정치의 소용돌이 속에서 시시비비로 역사 단절되고
민족의식 상실한 채 사리사욕 앞세운 시대정신 난무하고 있다.

제 공로가 인정받는 정의로운사회 실천으로 복지나라 초석다져
민족의 구심점이자 성지가 될 역사인물을 완주에서 부활시키자.
왜곡된 민족사 가치관을 바로잡고 민족역사 중심에는 홍익으로
황박의 호국정신 계승하며 조국의 평화기원 역사를 만들어보자.

/백승기 박사

아! 슬프도다. 벼슬을 내려놓고 부친 시묘중 사(私)를 버리고 충(忠)을 택함으로 의로운 목숨을 바쳤으니 효자가문에 반드시 충신난다는 말대로 최후의 순간까지 나라를 지킨 임진왜란의 숨은 영웅 의병장 황박 장군. 산 높고 물 맑은 이곳 전사지에 충혼비가 우뚝서게 되었으니 이것이 천세후에도 이를 보고 눈물을 흘리지 않은 이가 없을 것이니 장군의 호국정신 영원히 잊지않고 기억할 것이다.

황박 추모비
황박 추모비

<임진왜란 이치전투 의병장 황박장군 추모비에서> 황박(黃璞) 장군은 호는 죽봉(竹峯)이며 본관은 우주(紆州)이다. 1564년 전주부 우북면(현 왕궁면) 장암에서 3대 독자로 태어났으며 용모가 출중하고 골격이 우뚝했다. 1582년 무과에 장원급제하고 비변랑을 거쳐 1590년 종4품 전주만호로 봉직하던중 부친상을 당해 3년간 시묘살이를 하다가 임진왜란을 당했다. “내가 비록 상중이나 어머님의 명을 받들어 자진하여 참전하여 힘을 다해 나라를 구할 것이다”는 각오로 500명의 의병을 모아 6월 금산전투에 이어 7월 웅치전투에서 선봉장으로 싸웠고 이어 이치전투에서 후군장을 맡아 싸웠다. 이치전투에서 선봉장 황진이 적탄을 맞고 쓰러지자 황박 장군이 적을 무찌르고 황진을 구한 후 기력이 다해 1592년 8월 28일 전사했다.
 

이치 전적비
이치 전적비

#박창보 국학박사

▲웅치, 이치전투와 황박

지난해 개봉하여 흥행에 성공한 영화 ‘한산’을 볼 기회가 있었다. 마침 ‘걸어서 역사속으로’프로그램에 참가, 웅치전적지를 눈여겨 볼 수 있었다.

영화에서는 왜장 와키자카가 해전과 더불어 전라좌수영을 접수하기 위한 합동작전을 구상하고 육군을 투입하여 전주성 점령을 위해 전투를 벌이는 장면이 나온다. 이에 앞서 사천해전에서 이순신장군에게 사로잡힌 왜군 중에 의를 위한 전쟁이라는 명분에 감복한 준사가 마침내 투항을 한다. 이중첩자로 명을 받고 웅치로 가 정보를 전하고 막 시작된 전투에서 함께 싸운다. 수많은 왜군이 몰려오자 황박의 의병과 정담의 관군이 힘껏 분전하지만 저지선이 무너질 즈음 나타난 조선군에 의해 웅치를 지키게 된다. 의병장 황박이 전사하며 항왜 준사에게 신분을 의심한데 대해 사과를 하며 술 한잔 거하게 내겠다는 약속을 지키지 못해 미안하다는 유언을 남긴다. 영화의 스토리 전개상 황박의 죽음과 준사 이야기는 사실과는 다른 장면으로 각색하였을 것이다.

준사는 한산해전이후 안골포해전에서 사로 잡혔으므로 실제 웅치전투에 참여하지는 않았다. 다만 조선왕조실록에 1만여의 항왜가 있었다 한다. 아마도 또 다른 준사가 있지 않았을까? 그들은 화약과 무기제조, 각종 정보제공, 검술지도, 전술, 전투참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활약을 하였다. 명분 없는 싸움에 할 수 없이 참전을 했으나 주군을 따라 얼마든지 소속을 바꾸는 관행에 익숙하였을 것이고 더구나 굶주림과 힘든 군영생활을 견디기 어려웠을 것이다. 사야가(김충선)같은 유명인 몇을 빼고 이들의 조선정착에 대한 후일담은 기록이 없다.

임진란이 발발하고 선조가 몽진을 하자 왜군은 장기전을 대비해 곡창지대인 전라도를 접수하기 위한 작전을 세운다. 6군 고바야카와 다카카게의 부하장수인 안코쿠지 에케이가 지휘하는 왜군을 맞아 부친의 시묘살이 중이던 전주만호 출신 황박이 의병을 모아 금산전투에 참가한다. 곽재우장군에게 일격을 당했음에도 금산을 점령한 왜군은 전열을 정비하여 전주성으로 향하였는데 두 곳 험난한 고개를 넘어야 했다.

완주군에 위치한 웅치(곰티재)는 진안에서 전주로 넘어가는 운장산 자락이며 금산에서 전주로 가는 또 다른 길 이치(배티재)는 대둔산 자락의 험한 지형으로 접근이 용이치 않다. 조선의 1천여 병력에 비해 10배나 많은 1만여 왜군이 전주성으로 진격한 날이 1592년 7월 8일(음)이다.

웅치로 물러난 황박은 1방어선을 구축하고 좁은 험지에 의존하였지만 중과부적으로 후퇴하며 2방어선을 지키던 나주 판관 이복남과 합류하였다. 그러나 활과 화살은 조총으로 무장한 왜군의 상대가 되지 않았다. 안타깝게 또 다시 물러나 3방어선을 지키던 김제군수 정담과 합류하였지만 끝까지 분전하던 정담을 비롯해 장졸 모두가 전사하였다. 만약을 위해 후퇴한 이복남과 황박은 남원에서 합류한 동복현감 황진과 함께 안덕원전투에서 승리한다.

왜군은 비록 적이지만 조선군의 용맹에 弔朝鮮國忠肝義膽(조선의 충성과 의로움에 조의를 표함)이라는 팻말을 세우고 후퇴한다. 고경명의 의병이 왜군의 주둔지인 금산으로 향했기 때문이다. 자신이 창건한 절 이름을 성으로 삼을 정도의 불승인 안코쿠지 에케이가 도망만 하던 조선군의 처음 대하는 모습에 감복하고 충의의 죽음에 대하여 예를 갖춰 조문하는 마음이었을 것이다. 한산에서 큰 승리를 거둔 이순신장군도 후일 若無湖南是無國家(만약 호남이 없었다면 나라도 없었을 것이다)라는 편지글을 남긴다.

8월 13일 이치에 출몰한 왜군은 권율장군 휘하의 선봉장 황진에게 막혔다. 문자는 알지 못했으나 무재가 출중했던 황진은 나무에 의지하여 총탄을 막으며 활을 쏘았는데 거의 백발백중이었다. 왜군의 집중사격으로 황진이 총상을 입고 쓰러지자 후위에 있던 황박이 구출하는 과정에서 정작 자신은 지키지 못하고 전사하였으니 오호! 통재라. 그의 나이 겨우 29세였다.

권율장군과 처영대사의 활약으로 조선군이 힘겹게 승리함으로서 전주성을 지켜 이후의 전쟁을 유리하게 이끌어 갈수 있었다. 두 장군은 후일 행주에서도 승리한다. 이어 벌어진 금산탈환 작전에서는 의병장 조헌과 영규스님이 전사하였다. 이때의 승병에 대한 기록 또한 빈약하다. 호국불교에 대한 올바른 평가와 조사, 연구가 제대로 되어야 할 것이다. 이 또한 바른 역사를 위한 여러 할일 중 위대함을 위한 작은 행보가 아니겠는가. 황진 또한 임지를 떠나 경남 진주성을 방어하는 전투에 참여하였다가 안타깝게 전사하였다.

선조가 도망쳤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근왕병을 표방하던 관군이 도망치거나 의병을 파한 사례는 의외로 많다. 그럼에도 못난 지도자보다는 국가와 민족을 위해, 내 처자를 지키기 위해 한목숨을 기꺼이 바친 이름 없는 영웅들에 의해 한민족은 세대를 이어간다.
 

충남 금산 보석사 앞 의병승장비
충남 금산 보석사 앞 의병승장비

#김주원 (주)뱅기노자 대표, 전직 교사

▲임진왜란과 웅치 전투와 이치 전투를 치러 낸 전주성

왜구(일본)는 조선을 침공하여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발발시켰는가!

15세기에서 17세기 사이 유럽은 대항해 시대를 열어갔다. 대항해 시대는 세계사적으로 많은 영향력을 확산시켰다. 에스파냐의 후원을 받은 콜럼버스는 아메리카 대륙을 재발견함으로써 전지구적 국제무역을 가능하게 하였고, 유럽 식민제국을 탄생시켰다. 동반구와 서반구 사이에 교류를 촉발시켜 유럽 문화와 기술이 밖으로 확산되는 과정였다. 유럽 열강의 왕실과 귀족들에게 중국 도자기 인기가 대단하였는데 왜구는 국내 혼란한 정치와 경제 상황을 호전시키기 위해 명나라를 침범하기로 결정하였다.

명을 치기 위해 조선을 통과한다고 하니, 명에 대한 사대사상을 지닌 조선 조정에서 반대하자 이것을 트집 잡아 임진왜란을 일으킨다.

당시 조선의 정치, 경제, 사회 각 방면에서 큰 혼란이 일어나 신분 제도와 군역 제도, 공납 제도 등이 문란해지며 사회 전반이 매우 혼란스러웠다. 왜구는 이틈을 이용하여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앞세워 조선을 침공하게 된다. 부산진성과 동래성이 일거에 함락되고 충주의 탄금대까지 대패하니 왜군은 한양까지 삽시간에 도달할 기세다. 이에 조선 왕실과 조정은 수도 한양을 버리고 북쪽으로 도주하니 분노한 백성들은 곳곳에서 의병을 조직하여 항거하니 승병들도 나서서 나라를 지키고자 한다.

조선의 최대 곡창지대 전라도의 전주부성은 왜구의 침략을 막기 위해 의병과 합류하여 진안과 전주 사이의 웅치(곰티재)와 진산의 이치(배재)에서 죽기를 각오하고 싸움을 벌였다. 무기의 열세에도 여러 날 싸움을 벌이니 조선군의 시체가 고갯길을 덮었고 그 덕분에 전주성을 굳게 지킬 수 있었다. 왜구의 재침략 정유재란까지 겪어내며 백성들의 피해가 이만저만 아니었다.

조선은 정치적 실정이 나라의 혼란을 가져왔으며, 이것을 틈타 왜구의 침입이 있었고 한양을 버리고 북으로 쫓겨간 임금과 신하들을 보고 백성은 크게 실망하고 분노하여 의병을 일으켜 나라를 지켜고자 혈투를 벌였으니 피해가 더욱컸다. 당시 관료였던 이산해의 시 <노방원>으로 전쟁의 참혹한 상황을 기록하였다.

길가에 죽어 있는 세 사람 모두가 유랑하는 사람들이라

까마귀와 솔개에 먹힌 한 사람 지나가던 사람들 차마 못 본다

굶주린 사람들이 살 베간 사람 뼈만 앙상하고 살 한 점 없도다

전쟁이 7년 만에 끝나고 유럽과 교역을 하고 있었던 왜구는 돌아갈 때 조선의 수많은 도공을 잡아갔으며 백성들을 잡아가 유럽에 노예장사를 하였다고 한다. 류성룡은 다시는 이러한 전란을 겪지 않도록 <징비록>을 저술하였다. 지난날 있었던 조정의 여러 실책을 반성하고 앞날을 대비하며 후세에 길이 남길 바라는 반성의 기록으로 저술한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후손들은 징비록의 준엄한 경고에도 불구하고 지혜롭지 못하게 근대에 들어와 일본의 지배를 받고 말았다.

웅치와 이치전투의 임진왜란을 종식시키는데 적잖은 공이 있어 그 성과를 제대로 인정받아야 한다는 목소리를 15년 전에도 높였으나 아직도 부진한 것은 합리적 목소리를 내지 못하기 때문인가!

 

<기획취재팀> ▲취재기자단

△이방희 제2사회부장(부국장/팀장)

△김성봉 부국장(제2사회부/진안)·배종갑 부장(제2사회부/완주)
 

▲자문위원

△박창보 국학박사

△백승기 도시공학박사, ‘무릉도원 상상캠프’ 슈퍼바이저

△김주원 (주)뱅기노자 대표, 전직 교사

△국선희 선도문화연구원 자문위원, 전 전북대학교 겸임교수

△고개희 전사들 사무총장, 교보생명 신논현지점장

△윤재민 (주)RNS 대표, 신지식장학회 청년국장

△김세용 전사들 산악대장

이방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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