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어서 인물속으로] 한민족 역사문화탐방 (10)정여립
[걸어서 인물속으로] 한민족 역사문화탐방 (10)정여립
  • 이방희 기자
  • 승인 2023.10.18 14: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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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하공물(天下公物)을 꿈꾼 미완의 사상가 정여립

빛이 그림자 만들고 천지인(天地人)이 하나가 되었다.

동족상잔의 역사적 아픔을 아직도 치유하지 못한 대한민국
자유경쟁으로 누구나 평등하고 평화로운 국가를 염원하였다.
민주와 자본경제 복지사회 자유문화 천하공물 홍익정신으로
조국의 명예와 국가 안보 경쟁력을 국민 눈높이로 맞춘다.

사람으로 태어나 흐르는 세월 무슨 일을 얼마나 할 수 있고
지붕 굼벵이도 구르는 재주가 있다는데 사람이 제몫 없을까
하늘이 농사지어 일 년씩 걸리듯 역사도 성사될 때가 있기에
당대 발복 못하면 후대 광명 발복을 위해 혼신을 다 했었다.

짧은 생에 위대한 업적을 남긴 영웅들이 얼마나 많았을까?
곳곳에 추켜세운 영웅호걸 상들이 어찌 위대하지 않을랴 만
빛이 그림자 만들어 일조권을 따지는 잣대가 서로 다르기에
시공을 초월하여 우주가 다 만물의 머리를 쓰다듬진 않는다.

지구 46억 년인데 우리는 반만년의 역사를 재확인하려 하고
조상님들 태양 도시 신시(神市)를 열어 개천(開天)하실 때
지구엔 담수 해수 만나 처처에 조개무지 역사 막을 올렸고
생명문화 사람중심 문화로 내가 나라라는 역사를 시작했다.

중국 황하문명 이사팔로 8꽤 8방 8인으로 나누어 분리 했고
홍산문화 삼육구(369) 천지인(○□△)으로 삼세번 다듬었다.
내가있어 한울 네가 있어 두울 되니 네울로 다선 다섯 세상

다시 또 세워 하늘 열어 하늘 되려 열 개천(開天)이라 했다.

/백승기 박사
 

죽도
죽도

정여립(鄭汝立·1546~1589)은 조선 전기의 문신이자 사상가이다. 본관은 동래(東萊), 자는 인백(仁伯), 아버지는 첨정(僉正)을 지낸 정희증(鄭希曾)이다. 어머니는 박찬(朴纘)의 딸이다. 정여립은 15세때 익산군수인 아버지를 대신하여 일을 처리할 때 아전들이 군수보다도 더 어려워했다. 자라면서 체격도 늠름한 장부가 되었으며 통솔력이 있고 두뇌가 명석하여 경사(經史)와 제자백가에 통달했다.

 1567년(명종 22년) 진사가 되었고 1570년(선조 3년) 과거에 급제하여 이이(李珥)와 성혼(成渾)의 각별한 후원과 촉망을 받았다. 1580년(선조 16년) 예조좌랑이 되었고 1585년 홍문관수찬이 되었다. 본래 서인이었으나 이이를 버리고 박순(朴淳)·성혼을 비판하여 서인의 미움을 받고 선조의 신망을 잃자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였다. 낙향한 뒤 진안(鎭安) 죽도(竹島)에 서실을 짓고 대동계(大同契)를 조직하여 신분에 제한 없이 사람들을 모아 무술을 단련시키고 대다 사회(射會)를 여는 등 세력을 확장했다.

정여립 생가 추정 공원
정여립 생가 추정 공원

 1587년(선조 20년) 왜선이 전라도 손죽도(損竹島)를 침범했을때 전주부윤 남언경(南彦經)의 요청을 받아 대동계를 동원하여 왜구를 격퇴했다. 이후 대동계 조직은 전국으로 확대되어 황해도 안악의 변숭복(邊崇福)·박연령(朴延齡), 해주의 지함두(池涵斗), 운봉(雲峰) 승려 의연(義衍) 등 기인(奇人)과 모사(謨士)의 세력으로 확대되었다.

 그러나 1589년 이들이 한강의 결빙기를 이용, 황해도와 호남에서 입경하여 대장 신립(申砬)과 병조판서를 살해하고 병권을 장악하기로 했다는 고변이 황해도 관찰사 한준(韓準), 안악군수 이축(李軸), 재령군수 박충간(朴忠侃), 신천군수 한응인(韓㶐寅) 등의 연명으로 급보되어 관련자들이 차례로 체포되었다.

 정여립은 금구의 별장을 떠나 아들 정옥남(鄭玉男)과 함께 진안 죽도로 피신했으나 관군의 포위망이 좁혀들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로써 정여립의 역모는 사실로 굳어지고 정철(鄭澈)이 위관(委官)이 되어 이발(李潑) 등 동인의 주요 인물이 대거 숙청되는 기축사화로 이어졌다.

정여립 생가 추정 우물
정여립 생가 추정 우물

 ▲정여립 학문과 사상

 정여립은 주자(朱子) 사관(史觀)이 정통으로 여겨지던 조선사회에서 주자 사관과 배치되는 사마광(司馬光) 사관을 찬양했고 ‘천하는 공물(公物)이니 일정한 주인이 있을 수 없다’는 천하공물설을 설파하면서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충성관 및 절대군주를 부정했으며 주자 성리학에 얽매이지 않고 다양한 학문을 섭렵하고 실천하고자 했다.

 정여립의 사상은 주류에서 이탈하여 고루한 고정관념에 도전하는 혁신적인 사상이었으나 조선의 사상계를 주자 성리학 중심으로 이끌어 가려는 세력에게는 매우 불온한 것으로 인식되었다.

 정여립의 사상은 성리학의 이론보다는 구체적인 실천행위, 즉 민생문제 해결에 더욱 비중을 둔 것이었다. 또 대동계 조직때 신분적으로 하자가 있는 인물들을 적극 수용한 것에서 알수 있듯이 신분에 대해 상당히 개방적이었으며 병법에 대해서도 상당히 조예가 깊었다.

 

천반산
천반산

#박창보 국학박사

▲동서 붕당과 정여립

여말선초 건국에 협조한 훈구파는 이후 각종 요직을 장악하지만 정몽주 등 절의를 지킨 사림파는 지방에 은거하며 인재를 양성한다. 오랜 기간 학문을 통한 정치의식을 높여가던 사림파는 훈구파의 각종 치부 행위와 수탈을 비판하고 변혁을 꾀하게 되는데 이에 대한 서로간의 보복행위가 소위 당쟁과 사화의 형태로 나타난다.

선조 대에 이르러 훈구파를 대체하며 정권을 장악하게 된 사림파는 이조전랑에 추천된 김효원과 이를 반대한 심의겸과의 갈등이 벌어진다. 동대문에 집이 있던 김효원 세력을 동인이라 하고 서대문에 집이 있던 심의겸 세력을 서인이라 하였다.

동인은 선조 22년(1589년) 일어난 정여립 사건으로 다시 북인(남명학파)과 남인(퇴계학파)으로 갈리게 되는데 북악에 살던 이발이 처형되면서 안동의 유성룡이 구해주지 않았다는 이유였다. 이후 인조반정으로 북인이, 숙종의 갑술환국(1694년)으로 남인이 몰락한다.

정여립은 원래 서인이었으나 스승이자 영수인 율곡을 비판하며 집권세력인 동인이 되었다. 이이가 이조전랑 천거를 반대했다는 이유도 있으나 성격이 비슷한 동인 이발과 배짱이 잘 맞았기 때문일 것이다. 박학하고 재주가 있으나 출세지상주의자인데다 거침없는 성격이었다. 이를 경계하고 못마땅하게 여긴 선조를 등지고 귀향하였는데 열등감에 변덕스런 왕을 믿고 능력을 발휘하기에 앞이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정여립은 죽도에서 대동계를 결성하고 무예를 연마하는 등 문무겸전의 풍류도를 실천한 것으로 보인다. 신분의 차이를 두지 않았으며 활쏘기 대회를 열어 음주가무를 즐겼다 한다. 애국심과 개혁사상을 심어주며 마상무예를 비롯하여 각종 무기를 다루었는데 마침내 전라도에 침입한 왜구를 격퇴하는 전과를 올리기도 하였다.

대동계의 세력이 전국으로 확대되자 역모를 꾸미고 있다는 고변이 올라왔다. 조사관이 파견되자 죽도에 있던 정여립이 자결을 했거나 피살되었다는 설이 돌았는데 어느 쪽이든 억울한 죽음이었다. 선조의 명으로 서인 정철의 주도하에 기축옥사를 일으켜 과도하게 동인 1천여명이 처형되었고 그 여파로 마침내 자신도 파직을 당하였다. 동인으로부터 받은 사적인 원한을 지나치게 풀려 한 결과였다.

만약 정여립이 역모에 휘말려 죽지 않았다면 3년 후에 일어난 임진왜란(1592년) 당시 의병장으로서 대단한 활약을 하였을 것이다. 당시 대부분의 의병장은 곽재우, 정인홍, 정문부 등 대부분이 북인이었다. 정여립의 성향으로 보아 이발을 위시하여 정인홍, 최영경 등과 잘 맞았기 때문인데 이들은 화담 서경덕과 남명 조식 계열의 북인이었던 것이다.

서인은 숙종의 경신환국(1680년)으로 노론과 소론으로 갈린다. 궁실 소유의 천막을 허락도 없이 가져가 할아버지 잔치에 쓴 허적 등 남인의 처벌 수위에 대한 이견이 발단이 되었다. 송시열의 강경파가 노론이고 윤증과 윤휴의 온건파가 소론인데 이인좌의 난(1728년)으로 소론은 점차 쇠퇴한다.

후일 사도세자의 임오화변(1762년) 당시 노론은 동정론을 내세운 시파와 비판론을 내세운 벽파로 나뉜다. 이후 노론이 정국의 주도권을 잡으면서 세도정치를 출현시켜 점차 국력을 약화시키며 망국의 길로 접어든다.

사색당파란 북인, 남인, 노론, 소론 등 붕당을 일컫는다. 영, 정조시기의 탕평책은 정쟁을 극복하고 폐해를 극복하는 듯 하였으나 일시적인 효과뿐이었다. 어려서 보위에 오른 왕들의 주권은 약화되고 왕실의 외척으로 세도정치가 이어지며 권력을 악용함으로서 빈번한 민란을 초래하였던 것이다.
 

죽도
죽도

# 김주원 (주)뱅기노자 대표, 전직 교사

▲죽도로 들어간 정여립의 최후가 전해준 대동(大同)의 물결

 당대의 유능한 성리학자 율곡 이이와 우계 성혼의 인정을 받았던 정여립이 전라도 진안에 있는 죽도로 들어가 어떤 최후를 맞이했는지 궁금하다.

조선 중기, 정여립은 사대 가문에서 태어나고 20대 초반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을 얻고 학문적으로 이이와 성혼의 문하에 들어가 서인으로 활동하였다. 그의 영특함을 특별하게 여기던 이이에게 항변하자, 이이는 ‘내가 호랑이 새끼를 키웠구나!’라고 한탄하였다. 그즈음 서인에서 동인으로 선회를 하자 서인으로부터 변절자로 공격을 받았고, 이이를 지지하던 선조의 미움을 받게 되었다. 이에 관직에서 사퇴하고 고향 산천 죽도로 들어간다.

정여립은 혁신적인 사상과 과격한 성격을 지녔기에 죽도에서도 조용히 지내지 않는다. 대동계를 조직하여 양반, 평민, 노예 등을 가리지 않고 활발히 교류하며 그의 사상을 고취시킨다.

“천하는 공물이니 어찌 주인이 따로 있으리요, 하여 누구든 임금으로 모시고 섬길 수 있다.” 이런 사상은 당시에 하늘과 같은 임금을 능멸한다 하여 차마 생각조차 할 수도 없는 일인데, 하물며 공공연히 발설하는 것은 모두에게 역성으로 받아들여졌을 것이다. 이러한 사상은 너무도 앞선 것으로 최초의 공화주의자로 평가받는다.

대동계를 조직한 정여립은 매달 정기적 모임을 하면서 풍부한 음식을 제공하고 천반산에서 활쏘기 훈련, 개혁 사상 강론 등을 펼쳤다. 당시에 조선은 왜구의 잦은 침입으로 괴로움을 당하였기에 남언경 같은 관군의 요청을 받아 왜구를 무찌르는 혁혁한 공을 세우며, 대동계의 위세를 확장해 나가던 차에 황해도까지 진출하게 되었다. 이런 대동계의 활동을 의심한 황해도 관찰사 한준, 안악 군수 이축, 재령 군수 박충간 등이 1589년 조정에 고변함으로써 정여립과 대동계에 위기가 닥치고, 관군이 정여립의 집에서 압수한 ‘제천문’에 선조의 실덕을 열거하며 조선 왕조의 운수가 다했다고 논하였다.

이것을 ‘정여립의 난’으로 규정하고 송강 정철을 수사책임자로 하여 동인의 영수였던 이발을 비롯하여 1,000여 명의 생명을 죽음으로 몰고 간 숙청이 시작된다. 이를 기축옥사(1589년)라 일컫는다.

관군이 정여립을 잡아들이기 위해 죽도로 쳐들어왔을 때 자살하였다고 기록하였으나 이를 수긍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렇게 기백이 하늘에 닿을 정도로 높았던 지식인이 자신의 무고함을 고하지 않고 무엇이 무서워 자살했다는 것인가? 그를 따르던 많은 사람의 기대를 저버리고 자살했다는 것은 최초의 공화주의자에게 걸맞지 않은 행동이다.

전라도를 고향으로 두고 있는 사람으로 억울하고 안타까운 면이 있다. 정여립으로 시작된 기축옥사의 피비린내 나는 숙청으로 전라도의 지식인들은 모두 흩어지고 오명을 받아 관직에 나아가지 못하는 서러움, 지금도 반역의 땅, 반역의 후손으로 여겨지는 듯하여 안타깝다. 당시에는 흉악한 반역자로 몰렸으나 현대에는 그의 사상과 행동을 재조명하려는 노력들이 이어지고 있다. 정여립과 대동계에 대한 새로운 조명과 평가로 당당한 전라도 후예로 살아가고 싶다.

시대를 앞선 주장들이 후세에서 개혁적인 사상으로 받아들여지는 예는 많다.

대동계 정여립과 기축옥사, 동갑회 이몽학 사건을 다룬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 이준익 감독의 영화를 찾아서 감상해야겠다. 넷플릭스에 올려져 있는 짧은 영상을 보고 나니 더욱 흥미롭게 관심이 생기면서 심장 박동이 빨라지는 것을 숨길 수가 없다.

400여 년을 넘어 앞선 개혁 사상으로 전율을 느끼게 하는 정여립의 대동사상, 이제 열려있음을 최초 공화주의자 정여립에게 전달하고 싶다.

 

죽도
죽도

#윤재민 (주)RNS 대표, 신지식장학회 청년국장

▲ 정여립의 사상과 비전

정여립 선생의 사상은 무었일까? 도대체 무엇이 고향으로 돌아와 사회(射會)를 열어 강론이나 펴던 시골의 한 선비가 1,000여 명이나 죽음으로 내몰린 참혹한 기축옥사(1589년)를 불러일으켰을까?

정여립의 ‘천하공물설’과 ‘하사비군론’은 천하는 일정한 주인이 따로 없으며 누구라도 임금으로 섬길 수 있다는 것이다. 그 당시 조선에서는 받아들여질 수 없는 혁신적인 사상이었다.

정여립의 이러한 사상의 구체적 실천방안으로 대동계(大同契)를 조직했다.

철저한 신분제를 유지하는 조선시대에 대동계의 조직은 매우 파격적이었으며 그 구성원들은 양반사대부와 사림의 선비는 물론 서얼, 무사, 무뢰배, 노비, 승려, 도사, 산적들까지 참여했다. 또한 1587년에는 녹도에 왜적 18척이 들어와 행패를 부린다는 급보가 들어왔고 무술을 연마하던 대동계원들은 당시 전주 부윤으로 있던 남언경의 요청으로 출병하여 왜구들을 전멸시켰다.

이러한 대동계의 조직과 활동으로 보아 신분과 계급을 타파하고자 하는 평등정신, 나라의 위기에서 백성을 구하는 애국, 애민의 정신을 보여준다.

정여립선생의 혁명적인 사상은 불평등과 차별의 세상을 뜯어고치고 하였던 진보적 계급타파와 민중에 토대를 둔 개혁으로 조선 최초의 공화주의라 할 수 있다.

정여립선생의 새롭고 평등한 세상을 만들고자 하였던 개혁정신은 우리고향 전북에 많은 영향을 미친다.

정읍의 무성서원은 신분을 막론하고 원하는 사람 누구에게나 학문의 기회를 제공하여 개방과 평등을 실현하였으며 동학의 인내천 사상은 “사람은 곧 하늘이니리. 그러므로 사람은 평등하며 차별이 없으니, 사람이 마음대로 귀하고 천함은 나누는 것은 하늘을 거스르는 일이다” 평등세상을 이루려 동학혁명이 횃불이 타오른 곳이다.

또한 군사독재 정권의 불의와 독재에 항거하고 투쟁한 민주화운동으로 이어졌다.

물질만능 시대를 살아가며 우리는 전북의 낙후되고 소외된 경제적 현실에 실망과 좌절로 너무 무기력하다. 그러나 언제까지 깊은 한숨으로 시간을 허비하고 스스로를 책망 할 것인가?

정여립선생은 대동계가 지금 전북에 필요하다. 작은 차이를 넘어 대동단결하여 자립, 자강의 새로운 유도피아 건설의 롤 모델, 그 시작은 새만금이 아닐까?

 

<기획취재팀> ▲취재기자단

△이방희 제2사회부장(부국장/팀장)

△김성봉 부국장(제2사회부/진안)

 

▲자문위원

△박창보 국학박사

△백승기 도시공학박사, ‘무릉도원 상상캠프’ 슈퍼바이저

△김주원 (주)뱅기노자 대표, 전직 교사

△국선희 선도문화연구원 자문위원, 전 전북대학교 겸임교수

△고개희 전사들 사무총장, 교보생명 신논현지점장

△윤재민 (주)RNS 대표, 신지식장학회 청년국장

△김세용 전사들 산악대장

이방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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