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 영어보다 스마트한 말글
한글, 영어보다 스마트한 말글
  • 김중만 원광대학교 명예교수
  • 승인 2023.10.05 1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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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중만 원광대학교 명예교수

오는 9일은 577돌 한글날이다. 자기나라 말글을 발명한 것을 기념하는 나라는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유일하다. 지구상에는 수천 개의 문자가 있지만, 발명된 것은 오직 한글뿐이기 때문이다.

한글 발명은 여러 면에서 경이롭기 그지없다. 국정에 바쁘고, 중병환자에 가까운 처지에 있던 국왕이 중국 몰래 비밀리에 완벽한 문자 ‘한글’을 발명했기 때문이다.

발명의 세계에는 ‘간절한 발명의 필요성을 가지면, 세렌디피티(serendipity) 행운이 온다’는 말이 있다. 한글 발명의 영감은 어려운 한자로는 무지몽매한 백성을 일깨울 수 없고, 나라의 발전도 불가능하다는 절박한 세종대왕의 애민·애국 정신에 감동해서 아마도 하늘이 주신 것이 아니지 않은가 싶다.

이런 생각을 하다 보면, 영어와 한글 중 어느 문자가 스마트한 말글인지 비교해 보고 싶은 생각이 든다. 언어의 장단점 평가는 항목 선정에 따라서 다르겠지만, 디지털 시대가 되면서 객관적 비교가 가능해졌다고 볼 수 있다.

첫째, 한글 음소(ㄱ∼ㅎ와 ㅏ∼ㅣ) 수는 24개인데, 영어는 26개(a∼z)에 대·소문자가 있어 한글은 컴퓨터 자판에 영어보다 3개 기호키를 더 넣을 수 있다.

둘째, 한글은 모음 음소수가 10개인데, 영어는 5개로 음절 생성 수를 늘리기 위해서 예를 들면, a자처럼 여러 개의 음(ㅏ, ㅓ, ㅗ, ㅐ)을 부여해서 사용하고, 심지어는 banana(버내너)처럼 한 단어 중에서도 a가 다른 2개 음(‘ㅓ’와 ‘ㅐ)으로 발음되기도 할 정도로 복잡하다.

셋째. 영어는 그리스어, 라틴어 및 프랑스어 등이 많이 섞여 있고, 한글에는 없는 악센트와 묵음까지 있어 발음 체계가 매우 복잡해 단어마다 발음기호가 붙어 있다.

넷째, 한글은 유일한 자질문자(feature letter)이다. 예를 들면 ‘ㄴ’, ‘ㅅ’에 획 하나씩을 붙이면 각각 ‘ㄷ’과 ‘ㅈ’이 되고, 이들 각각에 한 획을 더 붙이면 ‘ㅌ’과 ‘ㅊ’이 된다. 모음 역시 ‘l’에 좌우상하에 (ㆍ)을 1개 붙여 각각 ‘ㅓ’, ‘ㅏ’, ‘ㅗ’, ‘ㅜ’가 만들어지고, 이들 각각에 다시 ‘ㆍ’를 덧붙여 ‘ㅕ’, ‘ㅑ’, ‘ㅛ’, ‘ㅠ’가 만들어져 음소 간 연계성이 있는 자질문자다. 반면 영어는 음소 간에 형태적 연관성이 전혀 없다. 그래서 휴대폰 키패드에서 영어는 대소문자 변환키 1개를 합쳐 27개 키를 배치해야 하지만, 한글은 10개 키만 있으면 된다.

다섯째, 한글은 최다 음절 문자다. 영어는 가로 배열만으로 음절을 구성하지만, 한글은 음소를 자음(초성)과 모음(중성) 또는 자음-모음-자음(종성) 순으로 조립해 무려 1만1172 개음절을 생성할 수 있는 다음절 문자다. 그만큼 어떤 문자라도 원음에 가깝게 발음할 수 있다. 또한 같은 내용을 작문 저장할 경우 영어보다 약 30% 저장 공간이 절약된다.

이런 여러 가지 장점에도 불구하고 한글이 확산되지 못한 것은 8.15 광복 전까지 한자 사대주의로 억눌렸기 때문이다. 반면 영어는 17세기 초부터 20세기 중반까지 영국이 육지 면적의 1/4을 지배한데 이어서 20세기 중반부터는 초강대국 미국의 국력이 크게 작용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컴퓨터, 휴대폰, 인공지능(AI), 음성 인식 시스템 등으로 조성된 디지털 생태계에서는 국력보다는 문자의 실용성이 크게 작용할 것이다. 한글의 위대성과 실용적 장점은 2009년과 2019년 두 차례 문자 올림픽에서 영어를 제치고 1등을 차지한 사실과 세계 유수의 언어학자들이 한글의 장점을 극찬하고 있는 현실에서 ”한글이 영어보다 스마트하다“라고 주장하는 것은 국수주의적인 관점은 결코 아니다.

김중만 원광대학교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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