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귀를 트고 사는 사회
방귀를 트고 사는 사회
  • 서정환 수필가
  • 승인 2023.09.03 14:5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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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정환 신아출판사 대표
서정환 신아출판사 대표

‘방귀를 튼 사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방귀를 뀌고도 무안함을 느끼지 않을 정도로 가까운 사이를 일컫는 말이지요. 그만큼 편안함을 느끼는 상대를 의미합니다. 그런 사람들이라면 꾀복쟁이 친구들이 먼저 떠오릅니다. 이런 친구들과 함께 있으면 우리는 가식 없이 존재할 수 있습니다. 굳이 잘 보이려고 노력을 할 이유도, 감추려고 할 필요도 없습니다.

사실 우리의 인격이란 것은 매우 복합적입니다. 회사에서 보이는 모습과 가정에서 보이는 모습이 얼마든지 다를 수 있습니다. 회사에서는 조용하고 소극적인 사람이지만, 친한 친구들끼리 갖는 모임에서는 좌중을 압도하는 인물도 있습니다. 술이 한 잔 들어가면 평소에 보이지 않던 모습이 드러나는 것도 심리적 억제가 풀리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안전하고 수용되어지는 분위기에서 진짜 자신의 모습을 드러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자신의 진짜 모습을 드러낼 만큼 편한 모임이나 관계가 필요합니다. 그 시간 동안에 우리는 ‘참자기’를 꺼내 보이고 마주할 수 있습니다.

정신분석학자인 도널드 위니코트에 의하면 자기에도 ‘참자기’와 ‘거짓자기’가 있다고 합니다. 참자기는 정신 기능의 핵심을 이루는 본연의 자기를 일컫습니다. 참자기는 사랑과 인정을 바탕으로 한 충분한 보살핌이 제공되면 드러나게 되어 있는 진정한 모습이지요. 그에 비해 거짓자기는 적절한 보살핌을 받지 못하는 환경 속에서 강요당했거나, 혹은 아이가 살아남기 위해 만들어온 위장된 자기를 뜻합니다.

거짓자기가 꼭 나쁜 것만은 아니라 합니다. 거짓자기는 생존본능의 산물인데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서는 꼭 필요합니다. 거짓자기는 아이가 자신에게는 절대적인 존재인 부모에게 거절당하지 않고 사랑받기 위해서 필요합니다. 참자기를 보호하기 위한 방패 역할도 합니다. 문제는 거짓자기가 지나치게 발달하거나 참자기가 계속 외면당했을 때입니다.

아이는 커가면서 ‘누구의 자녀’라는 역할에서 벗어나 차츰 ‘나’라는 감각을 익히고 정신적으로 독립해야 합니다. 그러나 거짓자기가 참자기 행세를 하면서 당연히 겪어야 할 사춘기의 방황과 갈등도 건너뛰게 됩니다. 그리고 안타깝게도 나이가 들어 뒤늦게 정체성의 혼란을 겪습니다. 얼핏 보면 안정된 삶을 살아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심리적으로 어른이 되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자기 내면의 진정한 욕망을 알아차리거나 표현하는 것에 어려움을 느낍니다. 그리고 인생을 자신의 뜻과 힘으로 살아갈 수 없기에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삶이 위축되기 쉽습니다. 타인의 평가와 비난, 관심과 인정에 신경 쓰느라 자아가 발달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유연한 정체성을 가져야 합니다. 특정 역할에 지나치게 동일시되어 있지 않는 삶, 삶의 여러 역할 속에서 자신을 바라볼 줄 아는 태도가 필요합니다. 물론 부족함이 느껴지는 역할은 좀 더 잘하려고 노력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실제로 그렇게 노력하다 보면 어느 정도 능력이 신장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끝내 못하는 일이 있더라도 자신을 무가치하게 여길 필요는 없습니다. 단지 당신이 그 역할과 잘 맞지 않을 뿐이니까요.

그러나 한 가지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여러 역할 정체성 속에서도 이를 통합할 수 있는 중심이 있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그 중심은 바로 건강한 자존감입니다. 건강한 자존감은 그 무엇과도 견줄 수 없는 내적 자산이며 삶을 성장으로 이어가는 원동력입니다.

건강한 자존감은 어떤 역할과 상관없이, 무엇을 이루었느냐와 관련 없이 나라는 사람 자체가 가치 있다고 느끼는 본질적인 가치감입니다. 그러므로 건강한 자존감은 특정 역할의 잘못이나 실패 앞에서 무너져 내리지 않게 하는 존재의 핵이 됩니다. 무언가 실수를 하거나 힘든 일을 겪었을 때 자신에게 화가 날 수도 있고 우울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건강한 자존감은 그러한 감정에 침범당하지 않는 영역입니다. 자존감 즉, 자기의 핵이 있으면 넘어져도 또다시 일어날 수 있고 상처를 입어도 다시 회복할 수 있습니다.

아무튼 이러한 자존감을 통하여 ‘방귀를 트는 사이’가 되는 그런 안정되고 편안한 사회를 만들어 가기를 원합니다.

서정환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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