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카우트의 추억
스카우트의 추억
  • 나영주 법률사무소 신세계 대표변호사
  • 승인 2023.08.27 1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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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영주 법률사무소 신세계 대표변호사
나영주 법률사무소 신세계 대표변호사

“나는 나의 명예를 걸고 다음의 조목을 굳게 지키겠습니다. 첫째, 하느님과 나라를 위하여 나의 의무를 다하겠습니다. 둘째, 항상 다른 사람을 도와주겠습니다.

셋째, 스카우트의 규율을 잘 지키겠습니다.”

30여 년 전 ‘국민학교’를 다니던 시절이다. 어느 날 친구가 멋진 제복을 입고 나타났다. 감청색 상·하의에 노란 스카프, 상의에 새겨진 다람쥐 계급(?). 너무 멋졌다. 집에 돌아가자마자 어머니께 졸랐다. 스카우트가 하고 싶다고. 어머니는 처음엔 안된다고 하셨지만, 스카우트 출신이셨던 아버지의 적극 추천에 결국 스카우트에 가입하였다. 제복을 입고 거울에 선 자신의 모습이 아직도 생생하다. 해태 타이거즈 어린이 회원에 가입하고서 빨강과 검정의 타이거즈 유니폼을 입었던 때만큼이나 행복했다.

당시 내가 다니던 학교는 보이스카우트 이외에도 아람단, 해양소년단, 청소년연맹 등이 있었다. 모두 탐험, 견학, 캠핑을 주목적으로 하는 어린이 단체였다. 스카우트가 된 이후 학교 운동장에서 했던 ‘뒤뜰 야영’에서 본 밤하늘의 별은 10살 어린이 눈에 총총히 박혔다. 지도를 보고 이해하는 독도법도 익히고, 나침반을 보고 산과 들을 탐험했다. 조막만 한 손으로 텐트도 손수 쳤다. 친구와 선배들, 선생님과 함께 밤엔 캠프파이어를 하다 머리카락을 태워 먹기도 했다. 송광사 훈련장에서 진행된 행사에서 전북 스카우트 어린이 회원 대표로 수천 명 앞에서 스카우트 선서를 했다. 선서내용을 어찌나 외우고 또 외웠던지, 군대에서 외운 복무신조는 잊었어도 아직도 기억이 난다.

스카우트 활동에서 고생은 요샛말로 ‘디폴트’(default, 기본설정값)이다. 아무리 학교 운동장이라도, 정돈된 캠핑장이라도 손수 캠프를 만들고 땔감을 수집하고 길 없는 산속을 나침반과 지도에 의존하여 탐험하는 일은 초등학생에겐 버거운 일이었다. 비라도 오면 우비를 입고 행군했다. 바위를 옮겨 다니며 은폐와 엄폐를 했다. 뒷산과 해변가의 쓰레기를 주우며 봉사활동도 했다. 그럼에도 즐거웠다. 스카우트는 강하고 용감하니까. 동료 스카우트 친구들과의 우애, 스카우트라는 소속감에 젖어 아무렇지도 않았다. 아이가 캠핑을 가자고 조르면 난감해하는 중년의 남자와는 달랐다.

스카우트는 영국의 퇴역 군인이 만들었다고 한다. 아이들을 모아 캠핑을 하고 생존훈련을 하던 일이 발전하여 1907년 정식으로 출범했다. 설립자의 이력과 활동에서 볼 수 있듯 초창기엔 군인과 비슷했다. 총을 들지 않고 평화를 사랑하는 ‘소년병’이었다. 그래서일까, 남자 아이들이 원초적으로 가지는 ‘군인놀이’에 대한 욕구를 충족시켜줘 인기가 많았다.

30여 년 동안 까맣게 잊고 지내다 요즈음 뉴스를 보고 스카우트를 오랜만에 떠올렸다. 스카우트 가입 전이라 1991년도 강원도 고성에서 개최된 세계 잼버리 대회에 참여하지 못했다. 세계 각지에서 온 외국 친구들과 캠핑과 탐험을 할 수 있었다면 얼마나 행복했을까. 새만금 잼버리 파행에 대해 보탤 말은 없다. 하지만 세계에서 온 청소년 스카우트들이 K팝 콘서트를 보고 도심 관광을 다니는 모습은 낯설다. 그것은, 적어도 내가 경험했던 스카우트 활동이 아니다.

나영주 <법률사무소 신세계 대표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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