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하(晩夏)의 향수(鄕愁)
만하(晩夏)의 향수(鄕愁)
  • 이성순 (유)효원 대표/법무사
  • 승인 2023.08.23 14: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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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망스럽고 부잡스러운 늦여름의 유년시절

 우리나라는 春夏秋冬이라는 전 세계에서도 상당히 드문 4계절을 모두 가지고 있는 나라이다. 4계절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우리는 의식주에 있어 상당한 불편을 감수해야만 한다, 매년 계절에 따라 다르게 옷을 입어야 하고, 생존에 필요한 곡식도 한정적일 수밖에 없으며, 거주하는 집도 그 구조가 상당히 복잡 난해할 수밖에 없는 불편함을 가지고 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우리 모두는 우리가 가진 4계절을 자랑스러워 할지언정 불편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만물이 소생하는 봄에 피는 꽃들은 우리의 눈을 호사스럽게 만들고, 햇볕이 내리쪼이는 여름에는 들판의 곡식을 살찌우고, 서늘한 가을에는 만곡을 여물게 하여 우리를 풍성하게 만들고, 온 세상을 하얗게 뒤덮은 겨울은 우리에게 그 계절과는 정반대의 따스함과, 평화로움, 그리고 한적함의 여유를 준다.

 우리를 힘들게 만들었던 여름장마가 지나가고 이제 우리에게는 사납게만 여겨졌던 여름을 밀어내는 흐르는 계절의 움직임이 보인다. 흰 뭉게구름의 넉넉하고 부드러운 선과 후덕함, 사납게 울어대는 매미 소리와 고추잠자리, 그리고 대청마루 밑에서 들리는 귀뚜라미 소리는 조만간 다가올 우리의 가을을 반겨주는 듯하다.

 황방산 자락에서 자라난 나에게 여름은 유난히 많은 추억을 남겨주었다.

 여름방학이 시작되면 학교 가는 길의 유일한 통로였던 나무로 만든 서곡교에서 미처 옷을 벗을 사이도 없이 친구들과 앞다투어 맑고 투명하기만 한 옥빛 삼천에 뛰어들었고, 시간가는 줄 모르고 냇가에서 놀던 우리는 여름방학 첫날을 엄마의 걱정 서린 잔소리와 함께 그렇게 즐겁게 맞이하곤 하였다.

 여름방학 내내 물놀이와 함께 황방산에 숨어 있던 하늘소, 풍뎅이, 반딧불 잡기는 왜 그리 시간가는 줄 모르게 재미가 있었던 지, 시망스러운 서너살 위의 더벅머리들을 뒤따라 다니며 했었던 수박서리, 참외서리는 왜 그리 애간장을 졸이면서도 즐겁기만 하였던지, 식물채집, 곤충채집, 일기쓰기 따위의 방학숙제는 왜 그렇게 생경 서럽고 생뚱맞았는지는 방학이 끝나갈 무렵에서야 느껴지는 전혀 새로운 유년시절의 가장 큰 근심거리였다.

 여름방학 놀이에 지쳐 잠시 황방산 자락에 누워 하늘의 뭉게구름을 멍하니 바라본다. 때로는 양으로, 말로, 사슴으로 변하는 그 뭉게구름 사이로 멀리 서울로 돈 벌러 떠난 누님, 군대간 형, 옆집의 옥이, 옥이를 버리고 떠난 옥이엄마, 옥이에 대한 걱정 등은 어린 나의 가슴을 헤쳐놓곤 하였다. 다시는 맑은 하늘을 볼 수 없을 것처럼 사나운 소나기와 함께 내려치는 천둥소리는 낮이라도 어찌 그리 무섭기만 하던지, 대청마루에서 바라보는 그 소낙비 내리는 한여름의 무서움은 아직도 뇌리에서 쉽사리 사라지지 않는다.

 초저녁 마을 입구에 느티나무를 호위병으로 거느린 동네 모정에는 더위를 못 이긴 동네 어른들, 머슴아들이 모여 모깃불 핑계로 저마다 부채를 흔들어대거나, 조무래기들은 옥수수를 던져넣고 검게 그을린 오리주둥이같은 입을 헤벌려가며 옥수수알을 주워 먹는데 시간가는 줄 몰랐다. 늦은 밤이 되어서야 밤하늘의 별을 헤아리며 보름달과 반딧불을 등불 삼아 모두가 잠든 불 꺼진 컴컴한 집으로 찾아들어 가던 그 늦여름 밤의 생경 서러운 추억은 우리들의 기억과 함께 잠시 머물렀다 흩어지곤 하였다.

 여름방학이 끝나고 개학날이 되면 우리의 등하굣길을 지켜주던 나무다리는 지난여름 홍수에 떠내려가고 휑한 다리의 흔적만이 남아 있어, 이내 수십리를 돌아야만 학교에 갈 수 있었고, 또다시 나무다리가 놓일 추석 무렵까지는 서로 부둥켜안고 삼천을 건너거나, 인근의 마전교나 추천교를 빙빙 돌아 학교에 가야만 했었다.

 개학 첫날 눈에 보이지 않는 어느 친구에 대하여 담임 선생님은 지난 여름에 물놀이를 하다 하늘나라로 갔다는 슬픈 사연을 목에 잠긴 목소리로 전해주었고, 토끼 눈망울 친구들의 눈가에는 눈물이 그렁그렁 하곤 하였다.

 그렇게 우리들의 유난히 시망스럽고, 부잡스럽던 유년의 여름은 꿈결처럼 흘러갔고, 가을 귀뚜라미와 함께 다가온 초가을은 또다시 우리를 세월이란 이름의 기다림으로 남게 한다.

 이성순<(유)효원 대표/법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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