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도 천년사’ 편찬, 슬기로운 해법을 찾아야
‘전라도 천년사’ 편찬, 슬기로운 해법을 찾아야
  • 박대길 전북민주주의연구소장
  • 승인 2023.08.15 13: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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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대길 전북민주주의연구소장

 어릴 적부터 역사가 좋았다. 민족과 나라를 위해서 살신성인한 위인들에 관한 이야기는 가슴설레게 하는 감동이었다.

  키는 작았지만 다부져서 ‘녹두’라 불리었고, 봉기 이후 ‘녹두장군’으로 불린 전봉준과 ‘동학농민혁명’은 지금도 생생하다. 이 인연으로 동학농민혁명을 공부하고, 기념사업의 현장에 있었는지 모르겠다.

 대학에서 「사학이론(史學理論)」을 배웠고, 사관(史觀)이라는 것을 알았다. 사전적 의미의 사관은 ‘역사적 현상을 파악하여 이것을 해석하는 입장’이다.

  ‘역사적 현상’이란 사건을 전하는 사람이나 연구자가 개인적인 생각을 배제하고 육하원칙에 근거하여 기록한 역사적 사건을 말한다. ‘해석’은 역사적 사실에 대해서 기록하는 사람 또는 연구자가 ‘자기 생각’을 덧붙여 설명하는 것으로 다양성을 가진다.

  즉 사관에 따라서 똑같은 사건도 다르게 해석된다. 이처럼 역사적 사실과 해석이 전혀 다름에도 기록과 구전으로 전하는 모든 역사적 사건은 사실과 해석이 혼재되어 전한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고 한다. 전근대사회에서 역사는 왕조의 흥망성쇠(興亡盛衰)가 우선이었다. 이때 승자가 역사를 집필하는데, 인간의 모든 기록이 다 그러하듯이 기록자의 입장, 즉 승자가 원하는 역사를 기록하였다. 예컨대 고려를 무너뜨리고 조선을 건국한 이들은 고려에 대해서 부정적으로 기록한다. 그래야 새 왕조를 창업한 명분을 세울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조선왕조실록』[이하 실록]에서도 볼 수 있다. 실록은 조선 태조부터 철종까지 25대 472년의 역사이다. 따라서 『고종실록』과 『순종실록』을 제외한다. 이유 중의 하나는 조선의 역사 편찬 원칙과 다르게 일본이 주도하여 식민지 조선의 역사를 편찬한 때문이다.

  이것은 앞서 지적한 바와 서로 통한다. 즉 조선의 역사를 긍정보다 부정으로 기록함으로써 식민지 조선의 독립 의지를 원천적으로 차단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편찬한 것이다. 공적으로 하는 관찬(官撰) 사서(史書)마저 이러할 진데, 집단이나 개인의 역사는 더 말할 나위가 없다.

 이와 달리 조선은 실록 편찬에서 객관성과 공정성을 유지하려고 부단히 노력하였다. 그 단적인 예가 수정 실록이다. 현존하는 실록 중 처음 편찬한 실록을 다시 수정하거나 개수 또는 손질한 실록으로 4질이 전한다. 바로 『선조대왕수정실록』과 『현종대왕개수실록』, 그리고 『숙종보궐정오』와 『경종대왕수정실록』이다.

  앞서 편찬한 내용 일부를 수정하거나 보완한 것으로, 객관적 사실보다 정치적 이해관계에 따라 다시 편찬한 것을 부인할 수 없다. 그런데 정치적 이유로 수정 실록을 편찬하면서 기왕에 편찬한 실록은 폐기하지 않고, 그대로 보존하여 후세에 전하였다. 이때 명분은 “후대의 평가에 맡긴다.”라는 것이었다. 처음 편찬한 실록과 뒤에 수정한 실록 모두를 남겨 후대의 평가를 받겠다는 당당함과 의연함이다.

 『전라도 천년사』는 개인이나 집단의 역사 편찬이 아니라 전라도 천년, 엄격히 말해 『전라도사(全羅道史)』로 관찬 사서이다. 따라서 ‘해석’이 아니라 역사적 사실에 관한 객관적인 기록이 우선이다.

  논란이 된 부분에 대해서 정확히 알지 못하지만, 역사적 사실과 해석의 혼재(混在), 그리고 이에 대한 접근 방식의 차이가 문제의 본질이 아닌가 한다. 앞서 언급한 수정 실록의 편찬과 보존의 지혜에서 해법을 찾을 수 있다. 그러나 여기에는 첨예하게 대립하는 양측의 자기 성찰이 우선이다.

 박대길 <전북민주주의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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