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십니까?
안녕하십니까?
  • 문리 연석산우송미술관장
  • 승인 2023.06.28 1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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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리 연석산우송미술관장

 후쿠시마 오염수 방류에 대한 무력한 대응, 출구가 보이지 않게 얼어붙은 남북 관계, 어처구니없는 10.29 이태원 참사에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부조리, 맥락 없는 자유를 내세워 부추기는 양극화, 끝없이 하락하는 경제지표. 여기까지 오르는데 정말 고생했는데 순식간에 날개 부러져 추락하는 것인가. 이런 모멸감 속에서 당신은 안녕하십니까?

 <안녕하십니까?> 전에서는 죽음, 폭력, 부조리, 상흔 등 아름답지 않은 것들을 다뤘다. 미술은 무균실에서 생산하는 실험의 결과물이 아니고, 불편한 세상의 얘기들을 담아내는 장치이다. 필자가 『아시아 지도리 프로젝트』를 추진하면서 인연 맺은 중국과 미얀마 미술가들의 작품으로 꾸린 기획전이다. 국제적으로 왕성하게 활동하는 미술가들의 예술적 발언을 통해 역사적 퇴행 속에서 몸살 앓는 한국 사회에 질문을 던지고자 한다.

 동시대 미술은 개인과 사회가 불편해서 숨기고 싶은 어두운 면을 들춘다.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에 들어선 이후, 미술은 작업실에서 생산하는 어떤 것에서 벗어나 일상과 사회로 발걸음을 옮겼기 때문이다. 미술이 아름다운 꽃밭만 가꿀 의무가 없기에 더는 꽃길에 머물지 않는다. 그런데 은유나 상징을 뺀 즉물적 직설이 묘하게 매혹적이어서 눈을 뗄 수 없다. 공포 영화에서 끔찍한 장면이 나오면 손으로 눈을 가리면서도 손가락 사이로 화면을 보는 이치와 같다.

 죽음은 모호하다. 살아 있는 자는 어떤 경우에도 죽음을 완전하게 이해하거나 경험할 수 없다. 내 경험이 아니라 나를 둘러싼 사람이나 동물들에게 속한 사건일 뿐. 이것이 죽음이 내포한 모순이다. 미얀마 사진작가 응게 레이(Nge Lay)의 <죽은 자기 모습 관찰하기>는 자신을 죽은 자로 분장해 배경을 조금씩 바꾸어서 연출·촬영한 사진이다. 살아 있는 자의 육체에서는 재현할 수 없는 죽음을 예술로 제시한 것. 이는 “우리 일상 자체가 엄청난 위험이며, 시간이 흐르면서 살아갈 날이 점점 소진해 간다.”라는 그녀의 철학적 고백이다.

 중국 조각가 류수이양(Liu Shui-yang)은 산업화 과정에서 파생된 잔해물(불에 타서 녹은 부산물)을 날것으로 제시하거나, 도시 언저리에서 부서진 보도블럭 등을 구조적으로 재현한다. <사다리>는 사회적 모순과 부조리, 상처와 무력감, 욕망과 공포를 민감하게 포착해서 표현한 것. 불에 탄 검은 각목 위에 대리석으로 정교하게 조각한 뼈(자세히 보면 상흔이 보인다) 15개를 일정한 간격으로 놓았다. 인간의 과도한 욕망에 의한 압축성장 과정에서 상처받고 죽어간 사람들의 넋을 기리는 듯하다.

 중국 조각가 리훙보(Lee Hong-bo)는 시각과 촉각적 충격을 의도했다. 얇은 신문지를 겹겹이 붙이고, 자르고, 갈아서 포탄을 만든 것. 그의 조각은 항상 관객 참여(작품을 만지고, 늘어뜨릴 수 있다)로 완성된다. 가정용 식칼 500개가 포탄 상자를 향해 날아들 듯 놓여 있어서 섬뜩한 긴장감과 아찔한 위기감이 감돈다. 감상자는 폭력적인 불편한 상황에서 포탄을 늘리는 놀이를 할 수 있다. 일상과 한몸인 죽음과 폭력, 공포를 예술적 놀이로 희화화한 것이다.

 이미 지나갔고, 당장 보이지 않아도 곧 닥쳐올 불편한 무언가는 분명 존재한다. 그래서 마냥 숨길 수 없다. 현실을 똑바로 바라보지 않은 채 세상을 두루뭉술하게 포장하거나 회피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를 아프게 한 폭력, 부조리, 혐오도 삶의 일부이다. 현대적 미술에서는 불편한 것에 눈길이 더 오래 머물기도 한다. 불쾌해서 피하고 싶은 것들이 오히려 우리가 살아 있음을 느끼게 한다. 주변에서 밀려난 불편한 어떤 것이 예술로 드러날 때 매력적이다.

 문리<연석산우송미술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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