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북인이 지켜낸 ‘조선왕조실록’, 민족 동질성 회복을 위한 남북 교류의 매개로 활용해야
전북인이 지켜낸 ‘조선왕조실록’, 민족 동질성 회복을 위한 남북 교류의 매개로 활용해야
  • 박대길 전북민주주의연구소 소장
  • 승인 2023.06.14 15: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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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대길 전북민주주의연구소 소장

 조선 500년의 역사를 기록한 『조선왕조실록(이하 실록)』은 우리나라의 국보일 뿐 아니라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문화유산이다. 우리는 드라마나 영화 등을 통해 조선의 역사를 쉽게 접할 수 있는데, 그것은 실록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그런데 조선 500년 역사가 오늘날까지 전해진 데는 전북인이 있었기에 가능했다는 사실에 대해서 알려 하지 않고, 그다지 관심을 가지지 않으며, 설령 알았더라도 무덤덤한 것이 현실이다. 더욱이 실록을 매개로 남북한 역사 문화 교류는 물론 언젠가 이루어질 평화 통일을 대비한 남북한 동질성 회복의 촉매제가 될 수 있다는 사실에 귀 기울이지 않는다.

 조선은 건국 초기부터 실록을 편찬하였다. 그리고 고려보다 더 철저하게 실록을 지켰는데, 서울의 춘추관과 함께 충주·전주·성주 등 지방의 3곳에 분산하여 보존하였다. 이를 사적분장지책(史籍分藏之策)이라고 한다.

 임진왜란 당시 조선은 성주와 충주 그리고 춘추관에 보관하던 실록이 멸실되는 참사를 겪었다. 이로써 유일본(唯一本)이 된 전주사고본 실록을 지키는 일은 조선을 지키는 일 못지않은 엄중한 일이 되었다. 이때 전라감사 이광, 경기전 참봉 오희길, 그리고 태인의 유생 안의와 손홍록 등이 혼연일체가 되어 전주사고본 실록을 내장산으로 옮겼고, 안의와 손홍록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해주를 거쳐 강화도와 묘향산 등지로 옮기며 지켰다.

 임진왜란 후 전주사고본 실록을 모본(模本)으로 해서 모두 다섯 부의 실록을 만들었고, 춘추관을 비롯하여 강화도?오대산?태백산?묘향산 등 다섯 곳에 분산하여 보관하였다. 그런데 북방에서 여진족이 흥기하는 등 위협이 커지자, 묘향산에 보관하던 실록을 무주 적상산으로 옮겨 보존하였다. 그리하여 전북은 조선 500년 동안 실록을 보존한 유일한 땅이 되었고, 전북인은 실록 지킴이가 되었다.

 일제의 조선 강점과 함께 실록을 보관하던 사고(史庫)제도가 폐지되었고, 적상산사고본 실록만 이왕직 장서각에서 관리할 뿐 정족산?오대산?태백산에 보관하던 실록 모두 일제의 손아귀에 들어갔다. 특히 오대산사고본 실록은 일본으로 반출된 후 관동대지진 때 거의 모두 사라져 버렸다. 이로써 ‘이괄의 난’ 때 소실된 춘추관사고본 실록과 오대산사고본 실록은 세상에서 자취를 감추었고, 정족산사고본과 태백산사고본 그리고 적상산사고본이 남았다.

 그런데 적상산사고본 실록은 해방 후 북한으로 몰래 가져가려다 실패한 일 있었고, 한국전쟁 당시 행방불명되었다. 한때 부산으로 옮긴 후 불에 타서 없어진 것으로 알려졌고, 기정사실로 굳어졌다. 그러나 적상산사고본 실록은 소실되지 않았다. 한국전쟁 때 인민군이 서울을 점령한 직후 김일성의 특별 지시에 따라 북한으로 가져간 것이다. 현재 적상산사고본 실록은 김일성종합대학에서 보관하고 있다. 이처럼 적상산사고본 실록은 묘향산에서 적상산으로, 이왕직 장서각에서 김일성종합대학으로, 남북을 오갔다.

 현존하는 실록 3부 중 2부를 전북인이 지켜냈다. 전북은 조선 500년 역사를 오롯이 지켜낸 실록 지킴이의 땅이다. 그런데도 전북인은 이에 관해서 관심조차 두지 않는다. ‘실록 지킴이’의 위상이 그 어느 곳보다 높고, 세계가 열광하는 한류 열풍의 근원임에도 이 소중한 역사 문화자원을 외면하고 있다. 특히 평화 통일과 이후를 대비하여 민족 동질성 회복에 촉매제로 활용할 수 있는 귀중한 자원을 방치하고 있음을 직시해야 한다.

 박대길<전북민주주의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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