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번 더 깊은 생각] 조선의 통신사, 그리고 후쿠시마 오염수 시찰단의 고민
[한번 더 깊은 생각] 조선의 통신사, 그리고 후쿠시마 오염수 시찰단의 고민
  • 송일섭 염우구박인문학교실블로그 운영자
  • 승인 2023.06.07 16:42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한번 더 깊은생각
한번 더 깊은생각

일본의 도요토미 히데요시(?臣秀吉)는 1587년에 쓰시마 도주를 불러 조선과의 교섭을 명령했다. 그 내용은 자신이 일본 전국을 통일했으니 조선의 선조 임금에게 자신을 알현하라는 것이었다. 만약 1588년까지 이를 이행하지 않으면 정벌하겠다고 협박했다. 그러나 조선은 ‘교화가 미치지 않은 야만국에 사신을 보낼 수 없다’라며 이를 거절하였다. 왜(倭)는 여기에서 그치지 아니하고 계속해서 요구하자, 조선은 류성룡과 이덕형이 제안을 받아들여 통신사를 보내기로 했다. 이들은 조선을 떠난 지 4개월 후, 1590년 3월에 일본 교토에 도착했다. 그러나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원정(遠征) 중이어서 만나지 못했고 무려 8개월을 기다린 후, 11월에야 그를 만날 수 있었다. 그는 방약무인(傍若無人)의 자세로 통신사 일행을 마치 속국(屬國)의 사신 대하듯 무시했다. 귀국길에 그들이 받아 든 답서는 가히 충격적이었다.

“국가가 멀고 산하(山河)가 막혀 있음도 관계없이 한 번 뛰어서 곧바로 대 영국(大明國)에 들어가 우리나라의 풍속을 4백여 주에 바꾸어 놓고 제도(帝都)의 정화(政化)를 억만년이 되도록 시행하고자 하는 것이 나의 마음이다.”

자신을 ‘태양의 아들’이라 하면서 단숨에 명(明)의 400주를 정복하겠다는 내용도 놀랍거니와 조선의 선조 임금에게 전하(殿下)가 아니라 합하(閤下)라고 칭하고 조선이 보낸 예물을 ‘조공’이라는 뜻의 방물로 기록했다.

통신사 일행이 이러한 사실을 두 눈으로 확인하고서도 귀국하여 선조에게 보고한 내용은 서로 달랐다. 황윤길이 왜가 침략할 것이라고 했고, 김성일은 그럴 가능성이 없다고 한 것이다. 왜(倭)가 작성한 국서의 방만함에 화가 나서 이의 수정을 요구했던 김성일이 왜 하필 그렇게 말했을까. 그것은 정파가 서로 달랐기 때문이다. 김성일은 정파가 다른 황윤길과 똑같은 대답을 할 수 없었다는 것이었다. 이는 국가의 위기 앞에서 정파적 판단이 얼마나 위험한가를 보여주는 사례다.

지난 3월, 윤석열 대통령이 일본을 방문하여 기시다 총리와 정상회담을 했다. 그동안 틀어진 한일 관계를 동반자적 관계로 복원하려는 노력의 일환이라는 점은 높이 평가할 만하다. 그러나 쌍방의 균형적 외교가 아니라, 일본의 요구에 대한 일방적 수용이라는 점은 매우 아쉽다. 강제징용이나 위안부 문제 등 과거사는 언급하지 않고, 배상도 요구하지 않겠다는 우리의 통이 큰(?) 결단에도 일본은 독도의 영유권 주장, 역사 왜곡, 후쿠시마 수산물 수입 개방을 요구했다. 우리가 반 컵의 물을 채웠으니 나머지는 일본이 채워줄 것이라는 낭만적 기대는 한순간에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지난 5월 7일과 8일에는 기시다 일본 총리의 답방이 있었다. 기시다는 현충원 참배에 이어 양국의 과거사를 개인적인 감정으로 표현했을 뿐이다. 이어 후쿠시마 오염수 방류에 대한 한국의 동의를 요구하였다. 그 후속 조치로 유국희 단장을 중심으로 한 후쿠시마 오염수 현장시찰단이 구성되었다. 그리고 지난 5월 21일부터 26일까지 후쿠시마에서 오염수 실태를 시찰하였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 기간에는 우리에게 역사적 비극을 안겨준 날이 들어 있었다. 바로 5월 23일이다. 지금으로부터 431년 전,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임진왜란을 일으켜 조선 백성을 살육하고 삼천리강산을 짓밟았다. 하필이면 이런 역사적인 날에 시찰단이 현장실사를 하면서 어떤 결론을 내릴지를 생각하니 마음이 무거웠다. 1590년 통신사 일행이 한자리에서 함께 보고서도 정작 임금에게 보고한 내용은 그 간극(間隙)이 너무 컸기 때문이다. 5월 31일 후쿠시마 오염수 현장시찰단의 결과 보고를 들었지만, 무슨 내용인지 쉽게 감이 오지 않았다. 기계적인 시스템을 확인하고 도쿄전력의 자료를 많이 확보했다는 이야기는 알겠는데, 정작 오염수의 안정성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었다. 즉, 단 한 방울의 시료도 가져오지 못한 채, 일본 측이 제공한 자료만 가져왔다는 것이었다.

시찰단이니까 문자 그대로 보는 것으로 그칠 것이라는 걱정이 그대로 나타났다. 현장시찰단 업무가 마치 정해 놓은 절차에 그쳐서는 안 될 것이다. 좀 더 눈을 크게 뜨고 보아야 한다. 인류 생존의 문제이니 과학적 기술적 검토가 충분하게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국민의힘 한 의원은 항간의 우려를 ‘괴담’이라고 깎아내리면서 “괴담이 과학을 이길 수 없다”라고 했다. 맞는 이야기다. 제발 과학적으로 분명하게 입증해 주기를 요구한다. 아울러, 임진왜란의 역사적 교훈에서 보듯, 국민의 삶과 안전에 관한 일인 만큼 제발 정파적 해석이나 접근은 하지 말기를 바란다.

 

송일섭 염우구박인문학교실블로그 운영자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