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던의 미술관과 트래펄가 광장의 한낮
런던의 미술관과 트래펄가 광장의 한낮
  • 이규하 전북대 명예교수
  • 승인 2023.06.06 1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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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규하 전북대 명예교수

  야외에서 만끽한 런던의 생활은 즐겁기 그지없었지만, ‘대영박물관(大英博物館)’이나 ‘미술관(美術館)’ 등 옥내 시설을 찾아갔을 때의 기쁨 또한 여간 큰 것이 아니었다. 수많은 그림 앞에서 작품의 연대와 설명글을 모조리 읽어가며 나의 작은 예술적 상상력의 범위 내에서 나름대로 감상하노라면 마음을 도취시키는 순간이 연속되기도 하지만, 한나절이 지나도록 쫓아다니며 응시하고 나면 고개를 지탱할 힘이 없어 머리 무게를 감당하지 못할 정도였다. 관람을 다 끝내면 인상 깊은 카드를 사가지고 밖으로 나왔다.

 미술관 앞 계단에 앉아 잠시 쉬었다가 사람들이 떼 지어 몰려들고 차가 끊이지 않는 미술관 인근의 트래펄가(Trafalga) 광장으로 갔다. 이 광장은 유럽이 거의 나폴레옹의 세력하에 들어갔고 영국 또한 그에 의해 짓밟힐 위기에 놓여 있을 때 영국 제독 넬슨(H. Nelson)이 트래펄가에서 프랑스·스페인 연합 함대를 격파시켜 제해권을 독차지하고, 이후 식민지 확대를 가능케 했던 영국 역사상 길이 빛날 대승전을 기념하기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여 거창하게 만들어놓은 곳이다.

너무 위대한 역사성 때문에 찾아드는 관광객 또한 이루 헤아릴 수 없지만, 광장 안 곳곳에서 시원스럽게 물줄기를 품어대는 분수들, 높이 솟아 있는 승전 탑, 그 주위에 산재해 있는 조각품과 그 사이사이로 몰려다니는 비둘기 떼가 바쁜 나그네들의 발길을 붙들고 있었다. 그리고 휴식을 취하는 여행객들의 가슴에는 옳고 그르고 분하고 억울한 사연이 모두 가려진 채 이긴 것만이 신성하다는 착잡한 회포를 안겨주는 듯했다.

 장시간에 걸친 그림 구경 때문에 피로하고 답답해진 몸과 마음에 시원한 기분을 불어넣기 위해 템스 강 쪽으로 걸어갔을 때 침체한 나의 영혼에 생기를 불어넣는 뜻밖의 광경에 직면했다. 불규칙적으로 흘러나오는 악기의 선율에 따라 소리 높여 외쳐대는 군중이 오합지졸을 이룬 가운데 거리를 휩쓸고 있었다. ‘베트남 전쟁을 반대하는 시위’였다. 군인들의 행진과도 같이 질서 정연한 독일식 시위에 비하면 마치 비틀스나 히피족을 연상시키는 너무 혼잡스럽고 제멋대로인 시위라서 나의 관심을 끌었으며, 그들의 목적지인 트래펄가 광장까지 따라가 바로 시위대 지휘부 옆에 앉아 그들 행동 하나하나를 지켜보았다.

 수만 명을 마력으로 이끌어가는 높이 솟은 시위대 본부석 위에는 땀에 젖어 악취가 풍길 듯한 남자들의 긴 머리가 요란스럽게 휘날리고 있었고, 세상 어느 곳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초현대파 모델 같은 여자들은 천 몇 조각을 걸친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광장을 뒤흔드는 고성능 앰프에 갖가지 악기를 연결시켜 놓고 흥분제를 잔뜩 먹은 듯이 소리 지르면서 춤을 추고 날뛰는 광란의 쇼는 시가지 한복판에서 상영되는 영화 <졸업(Graduate)>보다 훨씬 더 매혹적이었다. 그때를 회상하면 최근 영국 젊은이들이 템스 강 축제에 케이팝(K-pop) 가수를 초청해 달라고 시위하는 모습이 이해된다.

당시 유럽에서 벌어진 시위는 공통적으로 ‘호치밍’을 연호하며 반(反)베트남 전쟁을 외쳤지만, 그러한 모습의 이면에는 ‘복잡한 기계문명 사회의 단조로움 속에서 욕구불만에 빠진 고도로 발달한 현대인의 감각기관을 발광(發狂)하는 가운데 만족시켜 보려는 새로운 삶을 위한 부르짖음’의 표출인 듯했다.
 

이규하 <전북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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