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의 독립운동가- 오덕홍, 김일언, 정래의 선생
6월의 독립운동가- 오덕홍, 김일언, 정래의 선생
  • 전북동부보훈지청
  • 승인 2023.06.06 13: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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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측부터 산남의병 항왜혈전 기념비, 대장 정공 양세 순국기념 산남의진비, 산남의진 죽장 입임리 사적비

오덕홍·김일언·정래의 선생은 풍전등화에 처한 나라를 구하기 위해 결연히 일어나 목숨을 걸고 의병운동을 하신 분들이다.

전남 나주 출생인 오덕홍 선생은 1909년 8월 의병부대를 조직하고 부대원 20여 명과 나주 등지에서 활동했다.

1909년 9월부터 시작된 일본군의 남한대토벌작전으로 의병활동이 위축되자 일본군의 공격에 효과적으로 대응하기 위해 모집한 의병으로 소규모 유격부대를 창설해 일본군을 기습공격하고 배신자를 처단하는 등 일본군에 큰 타격을 입히는 성과를 달성했다.

의병전쟁의 마지막 순간까지 가장 치열했던 전장에서 유격전술을 전개한 의병장인 선생은 9월 나주에서 일본군에 붙잡혀 순국했다.

김일언 선생과 정래의 선생이 함께 참여한 산남의진은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고종황제의 측근이었던 정환직이 고종의 밀지를 받아 대규모 의병봉기를 계획한 것에서 시작됐다.

1907년 봄, 제2차 산남의병 총대장에 정용기를 추대하고, 김일언 선생은 우포장에, 정래의 선생은 우익장에 임명되어, 본격적으로 산남의진에서 의병활동을 시작했다.

김일언 선생은 1907년 8월 청하군 죽장면에서 일본군 척후 1명을 사살하고 일본군 영천수비대를 유인하여 일본군 1명을 처단했다. 이에 일본군 영일수비대와 청송수비대가 보복작전에 나섰지만 오히려 산남의진이 청하읍을 공격하여 분파소 및 부속 건물 등을 소각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1907년 10월 일본군의 기습공격에 입암전투에서 참패하고 정용기 의병장이 전사하자, 산남의진은 정환직을 총대장으로 추대하고 도포장에 김일언 선생을 좌익장에 정래의 선생을 각각 임명하고 조직을 재정비했다. 그리고 청송의 보현산과 영일의 북동대산 일대에서 의병전쟁을 수행하였다.

특히, 1907년 10월 청하분파소를 공격해 경찰 1명을 처단하고 분파소를 소각했으며, 11월에는 신녕분파소를 공격하여 총기 등 60여 점을 노획하는 성과를 거뒀다.

이후 산남의진은 서울진공작전을 토벌하고 남하하는 일본군을 경상도 일대에서 저지하기 위해 장기전을 펼치기로 결정했다.

이에 부대를 소규모 유격대로 나눠 남동대산을 근거지로 보현산, 팔공산 등지에서 유격전을 전개했으나 1908년 8월 총대장 최세윤 의병장이 체포되고, 주요 인물이 전사하면서 자연스럽게 해산되었다. 이때 김일언 선생의 의병활동도 산남의진과 운명을 함께했다.

한편, 정래의 선생은 산남의진이 해산되었으나 조성목, 정순기 등과 산남의진의 재건과 의병을 잇는 구국항일운동을 지속하기 위해 순국한 의병을 추모하는 단체로 위장한 참동계를 조직했다.

참동계는 영천 등 영남 일대에서 활동을 시작했지만, 안타깝게도 밀정의 밀고로 발각되어 선생은 1919년 제령 제7호 위반으로 체포됐다. 일제 경찰의 자백 강요, 심한 고문에도 굴하지 않은 선생은 1927년 10월 기소중지로 풀려났다.

정부는 선생들의 공훈을 기리기 위해 오덕홍 선생에게 1997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김일언 선생에게는 201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정래의 선생에게는 2022년 건국포장을 각각 추서했다.

 
 전북동부보훈지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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