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극인의 ‘상춘곡’, 신윤복의 ‘연소답청’에서 만나는 봄이야기
정극인의 ‘상춘곡’, 신윤복의 ‘연소답청’에서 만나는 봄이야기
  • 정영신 前전북소설가협회 회장
  • 승인 2023.03.30 1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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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영신 前전북소설가협회장
정영신 前전북소설가협회장

봄이다. 온갖 꽃들이 만발하는 꽃봄이다. 윤달이 들어 있는데도 꽃들이 제철을 잊고 다 피어 있다. 산에 들에 홍매화, 백매화, 개나리, 진달래, 자목련, 백목련, 4월에 필 벚꽃까지 온 산하에 이꽃 저꽃 다 피어있다. 우수(雨水) 경칩(驚蟄)이 다 지나고 이제 하늘이 맑아진다는 청명(淸明)이 다가온다.

홍진에 못친 분네 이내 생애 엇더한고/옛사람 풍류를 미츨가 못 미츨가/…엊그제 겨울 지나 새봄이 도라오니/도화(桃花) 행화(杏花) 석양리에 퓌여 잇고/녹양방초(綠楊芳草)는 세우(細雨) 중에 프르도다/…답청(踏靑)은 오늘하고 욕기(浴沂)란 내일 하세/…소동(小童) 아해다려 주가(酒家)에 술을 물어/얼운은 막대 잡고 아해는 술을 메고/송간세로(松間細路)에 두견화를 부치들고/…청풍명월 외에 엇던 벗이 잇사올고/…아모타 백년행락(百年行樂)이 이만한들 엇지하리.

정극인의 <상춘곡(賞春曲)>이다. 복숭아꽃 살구꽃, 버드나무꽃…, 온갖 꽃들이 만발한 봄날의 정경을 보며 완상(玩賞)하는 노래이다. 삼월 삼짇날을 전후로 산으로 들로 꽃구경을 가는 답청(踏靑)은 미루지 말고 오늘하자고 한다. 실제로도 정극인은 정읍 칠보면 무성서원 인근 처가 고향에 내려가 여생을 보냈다. 무성서원에서 동남쪽으로 고개를 들면 운암저수지를 넘어온 칠보발전소가 보인다. 칠보면 무성리는 적은 고을이지만 식량을 마련할 논밭도 많고 물이 맑고 산천 경치가 수려하다. 그래서 시인묵객들이 끊임 없이 찾아와서 서로 교류를 했다고 한다. 최초로 ‘풍류’를 정의한 최치원도 태인태수로 1년간 머물렀었다. 실제로도 정극인의 <상춘곡(賞春曲)>을 따라 칠보면 무성서원 둘레길에 올라가 보니 매화와 목련, 산수유꽃이 만발해 있고 발길마다 지칭개나물, 산고들빼기, 제비꽃, 민들레꽃 등 야생화도 흐드러지게 피어 있었다.

<상춘곡(賞春曲)>을 들여다보면 백화가 만발한 봄날 그 봄경치를 구경하면서 진달래꽃을 따다가 화전(花煎)을 부치고 작은 아이에게 주막에 가서 술을 가져오라고 해서 그 술을 둘러메고 꽃이 만발한 산으로 나들이를 간다. 정극인은 그저 욕심 없이 산들이 병풍처럼 둘려진 시골마을에서 맑은 바람과 밝은 달을 벗삼아 봄날을 즐기는 게 백년을 사는 즐거움 중 최고라고 노래한다.

봄날을 즐기는 옛선비들의 기록은 문학작품 외에도 조선조 화공인 신윤복의 그림 <연소답청(年少踏靑)>에도 그려져 있다. 어여쁜 세 여인이 트레머리에 갓 꺾은 봄꽃 몇 송이를 앙증맞게 꽂고는 금방이라도 날아오를 듯한 선녀옷 마냥 야실한 봄 저고리를 입고 이산 저산 꽃 구경을 하고 있다. 바위산 끝자락에는 봄바람에 하늘거리는 연분홍 진달래꽃이 한 무더기 피어있다. 바위산 아래 춘흥에 흠뻑 취한 젊은 양반네는 자신의 갓과 하인의 벙거지까지 바꿔 쓰고는 기분이 좋은 듯 만족스럽게 웃으며 배까지 쑥 내밀고 봄꽃 닮은 여인들을 호위하고 있다.

남녀유별, 남존여비(男尊女卑)의 엄연한 유교사회에서도 봄날 꽃산의 향기, 그 춘흥에 젖어 양반 체면에 일부러 하인의 벙거지까지 빼앗아 대충 둘러쓰고는 말고삐도 직접 잡고 경마잡이를 하고 있다. 양반네들은 혹여 떨어질세라 어여쁜 여인을 털빛이 매끄러운 건강한 말에 태우고 조심조심 꽃산으로 안내하고 있다. 양반의 상징물인 긴 담뱃대인 장죽(長竹)도 여인에게 다 내어주었다. 울안에만 갇혀 지내던 기방의 여인들이 언감생심(焉敢生心) 양반네의 장죽도 물고 잘생긴 천마도 타고 자청한 양반 경호원의 밀착 호위까지 받으며 산놀이를 가고 있다. 오늘 하루만큼은 양반집 규수가 부럽지 않다.

풍류를 즐길 줄 아는 조선의 선비들, 그리고 그 시서화, 가무, 잡기에 수준급으로 고루 능한 기방의 여인들, 봄은 이렇게 신분의 벽도 허물고 세상 모든 만물을 향해 마음을 열고 품어 안으며 사랑을 주는 진정한 유불선 통합이라는 최치원이 강조하던 그 진정한 ‘풍류’의 세계로 들어가 봄날의 세상만물과도 교감할 줄을 안다. 그래서 봄꽃처럼 어여쁜 세 여인에게 세 마리 말을 다 내어주고 경마잡이를 자청하며 푸릇푸릇 새 풀이 돋아난 산길을 걸어가고 있다.

봄이다. 온갖 꽃들이 만발한 꽃봄이다. 삼천천, 추천천, 송광사의 벚꽃이 벌써 다 만개했다. 이처럼 봄꽃들이 만개한 이 아름다운 봄날에 세상만물이 소생하는 그 신비로운 숨소리를 들으며 사랑하는 사람들과 모두들 꽃구경을 가보자.

정영신<前전북소설가협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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