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을 밀고 들어온 가모장(家母長) 코끼리
생각을 밀고 들어온 가모장(家母長) 코끼리
  • 이소애 시인/문학평론가
  • 승인 2023.03.28 16:1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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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소애 시인/문학평론가<br>
이소애 시인/문학평론가

질서가 무너진 봄꽃이 핀다. 백목련 꽃망울이 탱탱하게 봄볕을 줍고 있었는데, 꽃과 눈맞춤을 하기도 전에 매화, 벚꽃, 동백, 개나리꽃이 한꺼번에 꽃 잔치한다. 슬프도록 아름다운 동백꽃이 붉은 카펫을 깔아 처절했던 지난겨울의 생존 투쟁 이야기도 듣고 싶었는데 제비꽃이 동백의 피눈물을 응시하고 있다. 보리뱅이 봄까치꽃 광대나물도 길가 둔덕에 순서도 없이 봄 나팔을 불고 있는 건, 꽃의 리더인 태양이 인간 세계 모습을 꽃과 소통했기 때문이리라.

초등학교 시절엔 시골에서 살았다. 탱자나무 울타리 밖 공터를 어머니는 남새밭이라고 불렀다. 어머니의 하루는 남새밭에서 시작했으며 호미랑 곡괭이가 늘 어머니 곁을 떠나지 않았다. 이른 봄이면 울타리 밖 텃밭을 오가며 흙을 반반하게 고르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덩어리 흙은 가늘게 부수고 분가루처럼 손으로 문질러 부드럽게 하셨다. 어머니 머리에 두른 하얀 수건이 햇볕 부스러기를 받아 내면 옥수수, 감자, 고구마가 가마솥에서 모락모락 맛을 익히고 있었다.

남새밭 한 이랑엔 아욱을 심고, 배추 무 고추를 반 이랑씩 심었다. 마늘이나 파도 잊지 않고 심었다. 가끔 나는 밭고랑에서 오이와 가지를 몰래 따서 간식으로 먹었다.

남새밭 옆으로 아주 큰 논이 있었다. 이름 봄 소 쟁기질을 할 때면 논으로 나가 구경하는 게 재밌었다. 쟁기질이 아니라 써레질이라고도 불리는 농사일은 벽에 걸린 달력보다 더 자상하게 계절의 흐름을 말해주었다.

옆집 아저씨가 소몰이 쟁기질로 논의 흙을 갈아엎으면 어디에서 알고 날아오는지 노고지리가 뒤엎은 흙의 벌레를 먹는다. 용케 써레질에 다치지 않게 깡총 춤을 추는 종달새의 날개를 기억한다.

소를 몰고 쟁기질하는 아저씨는 “이랴~” “워~ 워~ 워~”라는 소리에 따라 소는 가다가 멈추고 멈추었다가 갔다. 봄을 재촉하는 농부의 소리가 온 동네에 울려 퍼지면 진짜 봄이 오고 있었다. 생각이 수십 년 전 고향의 봄을 끌고 왔다.

진화생물학 권위자 장이원의 20가지 동물의 리더십 이야기인 서적 『인류 밖에서 찾은 완벽한 리더들』을 탐독하면서 온돌방을 덥히는 굴뚝에서 피어오르는 하얀 연기 같은 미래가 보였다. 허우적거리는 절망감에서 나이 듦에 대한 희망이 솟구침을 느꼈다.

실오라기처럼 가느다란 힘이 보였다. 동물들의 리더십에 관심을 두는 이유는 현재 내가 처해있는 환경이 불확실한 사회이며 불평등한 사회이기 때문이다.

암컷 중심 사회의 코끼리 집단 리더십에 호기심이 가득하였기 때문이다. 경험과 지식으로 무장한 늙은 코끼리의 가모장은 바로 내가 나를 열등감에서 건져주기 때문이다.

10여 년 전 아프리카 여행에서 얻은 나이 듦에 대한 지혜가 떠오른다. 점점 허약해지는 정신적 흔들림이 위험 신호에 접어들 때의 일이었다. 케냐의 암보셀리 국립공원에서 코끼리 이동 질서는 놀라웠다. 맨 앞의 리더 코끼리 때문이다. 늙었으나 힘 있어 보이는 할머니 코끼리의 울음소리는 천둥소리보다 컸다. 어린 코끼리들은 가운데 두고 어른 코끼리들이 에워싸며 천천히 이동하는 가족 나들이가 신기해 보였다. 리더십인 늙은 코끼리의 발걸음이 당당해 보였다. 주눅 들지 않아 보였다.

“나이가 많은 가모장일수록 공격적이고 위험한 낯선 코끼리를 잘 피해 무리를 인도”한다고 한다. “가모장 중에서도 할머니 코끼리가 이끄는 무리가 더욱 안전하고 먹이 활동 및 양육도 성공적”으로 이끈다는 작가의 말이다. 가모장만이 가지고 있는 경험의 지혜 때문이다.

가모장의 뛰어난 능력은 기억력이라 한다. 조상으로부터 터득하고 저장해두었던 기억으로 코끼리 집단을 위기에서 모면하는 가모장의 리더십은 동물에게 배워야 하지 않느냐고 질문을 던져본다. 코끼리는 절대적인 리더십을 가지고 있지만 절대 군림하지 않는다. 코끼리의 무리에서 어려운 문제들에 대한 해결책은 조상으로부터 터득한 기억으로 해결한다. 늙은 가모장은 무리 집단에서 존경받는다고 하니 인간이 터득해야 할 숙제이다.

제멋대로 꽃망울을 터뜨리는 나무에, 봄의 전령들에게, 경험과 지식을 축적한 윗사람의 말을 귀담아들어 보라고 경고하고 싶은 봄날이 왔다.

이소애<시인/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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