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증이 아름다운 고통으로 변신할 때
통증이 아름다운 고통으로 변신할 때
  • 이소애 시인/문학평론가
  • 승인 2023.01.26 17: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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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소애 시인/문학평론가<br>
이소애 시인/문학평론가

얼굴은 마음속에 숨겨둔 감정의 광고판이다. 미소가 얼굴 한가득 파동을 일으킬 때까지 감정조절을 하면 고통에서 쉽게 탈출할 수 있다. 기억은 이미지의 사고이기 때문에 고통을 동반하는 사건은 기억하지 않는 것이 행복으로 가는 지름길이다. 우포늪 늪배를 젓는 아름다운 물결은 바람과 빛의 뜻이다. 막연한 풍경이 어깨 위에 무겁게 걸리면 삶이 그늘지지 않도록 바람을 붙잡아야 한다. 손을 휘저어서라도 통증은 행운이라며 기억을 붙들어야 한다. 고통으로 변신하기 전에 스스로 뛰어다녀야 한다. 마치 음식의 미각 절반은 어린 시절의 기억으로부터 오는 것처럼 말이다.

나무의 옹이처럼 나무가 견디어 온 인고의 흔적이 사람의 몸에도 있다. 아픈 상처는 참회의 순간을 가져보는 행복의 지름길이다. 나무에서 영감을 자극하는 힘이 솟는다. 지나온 삶도 상처가 깊으면 깊을수록 더 단단히 꿈을 안고 옹이가 박혔을 터이다.

모든 아픔과 미움을 품고 사는 나무처럼 살아야겠다는 각오가 가끔 쓰러져 가는 허약한 생각을 일으켜 세운다. 칼로 도려낼 듯한 통증일지라도 자신의 모든 것을 아낌없이 내어주는 나무처럼 살아야 한다고 결심해본다. 나무는 자신을 나이테 속에 옭아매며 적막한 숲에서 생명을 유지해 왔던 것처럼 말이다. 나무의 삶 속에서 나를 발견하는 연민이 스며 있을지도 모른다.

나무는 죽어 가면서도 숱한 생명의 피신처가 되어 준다. 고사목이 된 나무는 오랜 세월을 쌓으면서 흙무덤을 자기 몸으로 만든다. 쓰러진 통나무는 다람쥐, 박새, 딱따구리, 올빼미 그리고 동고비의 피신처이자 다양한 곤충과 식물을 길러준다. 폭풍이 몰아칠 땐 새나 곤충의 안식처가 되어 주듯 고통에 부대끼는 몸을 슬퍼하기보다는 죽어가면서도 많은 생명의 보금자리와 피신처가 되어 주는 나무로 변신하는 삶을 생각해 본다.

그런 후 씨앗은 자라나는 식물에 뿌리를 내리고 줄기를 위로 뻗으라고 알려주는 메시지를 저장해 둔다. 살아가는데 필요한 에너지와 물과 햇볕으로 유전적 청사진이 들어있는 프로그램을 씨앗이 기억한다.

나무들은 흙 속에서 뿌리끼리 서로 섞여서 사실상 하나가 된다. 서로 소통하고 서로 물질을 주고받기도 한다. 서로 돕고 산다. 고립된 위태로운 삶에서 탈출한다. 협력과 나눔에서 서로 잘린 나뭇가지는 오히려 강해진다. 잘려나간 나무의 안쓰러움에서 동물의 날카로운 이빨 자국을 보듬는다. 힘센 자로부터 견디어 낼 수 있는 강력한 삶의 투쟁을 준비한다.

병이나 해충이 심할 경우 서로 정보를 공유하는 소통은 숲의 공동사회에서 살아가는 방법이다. 나무들은 반격할 수 없다, 포식자들에게 꼼짝없이 당한다. 병원균 공격으로부터 자신을 방어하는 나무처럼 사람도 그래야 생명을 보존한다.

자신의 모든 것을 아낌없이 내주는 고사목은 엄벙덤벙 사는 생을 숙연하게 한다. 숲속에서 나뒹구는 나뭇가지는 누구의 생명이었을까. 떨어져서 흙내음을 맡았을 때 죽음의 두려움은 어떠했을까. 나무의 눈물이 텅 빈 가슴에 계곡처럼 흐른다.

계단을 오르는 일이 마치 높은 산을 오를 때처럼 자신감을 잃었을 때, 순간 스쳐 지나가는 허약한 두려움이 삶의 시곗바늘을 흔들어 놓는 사람. 사람의 그림자는 고사목 그늘처럼 온화한 숨소리가 없다. 다만 양어깨를 부축해 줄 가족을 그리워할 뿐이다. 가족의 따뜻한 접촉이 살아야겠다는 통증을 잊게 한다. 나무도 그렇다.

식물도 사람처럼 남의 대화를 엿듣는다. 귀로 소리를 듣는 것이 아니라 냄새로 소통한다고 한다. 이는 벌레의 공격을 감지하고 대비하기 위한 생존 방법이다. 산쑥이 그렇다. 벌레에게 파먹히면 공기 중에 특이한 냄새를 풍겨 벌레의 존재를 알리면 바로 체내에서 특정 화합물을 분비해 벌레의 침범을 막아낸다. 이는 미국 코넬대 생태학자 앤드리 케슬러 교수가 야생 담배가 산쑥끼리 주고받는 냄새 신호를 감지해 벌레의 공격에 대비한다는 사실을 밝혔다.

고사목을 떠올려본다. 고사목은 위대하다. 오래된 고사목에서 꿈틀거리는 곤충의 생명력이 아름다웠다. 동물의 피신처가 되기도 하고 생물을 길러주는 고마운 고사목이다. 고통이 통증을 견디면서 사노라면 봄은 초록빛으로 멀리서 천천히 오고 있을 것이다.

이소애<시인/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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