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헌수 시인과 함께 읽는 책 놀이터 11 - 첫눈
김헌수 시인과 함께 읽는 책 놀이터 11 - 첫눈
  • 김헌수 시인
  • 승인 2022.12.07 15: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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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첫눈 /엘함 아사디/책빛출판사>  

  ‘첫’으로 시작하는 말을 생각해보았다. 첫 책, 첫 여행, 첫 타석, 첫 수업, 첫차, 첫사랑, 첫걸음, 첫눈 등등. 아이들이 가장 많이 좋아한 단어는 ‘첫눈’과 ‘첫사랑’이었다. 첫눈이 내리는 날의 기쁨을 말하며 즐거워했다. 질문이 많은 주호는 ‘첫비’는 왜 없나요? 라면서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승유는 ‘첫사랑’을 말하며 눈이 반짝였다. 같은 반 짝꿍 민지에게 아직 고백을 하지 못했다며 웃는다. 첫눈이 내리는 날에 고백을 해본다는 말에 아이들은 이 모양 저 모양으로 훈수를 두었다.

  첫눈이 빨리 오기를 기다리며 엘함 아사디 작가의 크고 길쭉한 판형의 그림책을 꺼내 들었다. 이야기 속에 이야기가 나오는 구조로 모노타이프 판화 기법이 도드라진 아름다운 책이다. 이란을 비롯한 중앙아시아 국가들에서 봄을 시작하는 첫날이자 새해인 ‘노루즈’라는 명절과 관련된 나네 사르마와 노루즈의 이야기다.

  첫눈이 내리는 날 소녀는 밖에 나가 눈도 밟고, 개미가 추울까 걱정도 하고, 눈송이도 받아먹으며 즐거워한다. 내리는 눈을 받아먹기 위해 나도 모르게 입을 벌리고픈 충동이 들었다. 소녀는 꽁꽁 언 몸으로 따스한 할머니 품에 안겨서 ‘눈’이 어디에서 왔는지 이야기를 듣는다. 어릴 때 할머니에게 듣던 전래동화, 이야기를 들으며 할머니 품속으로 파고들고 미소를 짓던 일이 생각났다. 할머니가 들려주는 이야기는 고대 페르시아로부터 내려오는 나네 사르마와 노루즈의 사랑이야기다. 사랑이라는 말만 꺼내도 꺄악 소리를 지르는 아이들과 책 속으로 빠져들었다.

  페르시아에 부드러운 머릿결을 가진 나네 사르마는 구름 보다 높은 곳에 살았다. 엄청난 힘으로 호수를 녹이고 봄의 온기를 가져온다는 노루즈 라는 남자의 이야기를 듣게된다. 나네 사르마는 그를 떠올리며 노루즈가 집에 꼭 들러주기를 고대한다. 집안 구석구석을 청소하고 구름 위에서 살며 자신을 세상 밖으로 데려갈 노루즈를 기다린다. 나네 사르마는 집안 청소를 하며 먼지를 털어내었고 날아간 그 먼지를 세상 사람들은 눈이라 부른다고 했다. 그리고 식물들에게 주던 물뿌리개에서 나온 물은 비가 되었다. 또 나네 사르마의 아름다운 목걸이가 풀려 떨어진 구슬은 우박이 되었다.

 드디어 3월 21일 노루즈가 봄과 함께 찾아왔다. 나네 사르마는 그만 잠이 들어 버리고 노루즈는 나네 사르마의 손가락에 장미 한송이를 남기고 조용히 떠난다.

  “기다릴 줄 알아야 한단다. 기다리는 행복만으로도 이미 충분하거든” 이야기를 마친 할머니의 대답 속에서 많은 것들이 들어 있음을 깨달았다. 노루즈를 만나지 못했다는 슬픔을 이기고 다시 노루즈를 기다리는 설레임과 행복을 택한 나네 사르마를 보았다.

  책을 읽은 아이들은 다양한 기다림을 말했다. 소풍 전 날 내일이 빨리 오길 기다렸던 경험, 동생이 빨리 태어나길 바랬던 경험, 읽는 게 더딘 짝꿍의 이야기를 천천히 들어주던 경험, 체험학습이나 놀이동산에서 순서를 기다렸던 경험, 기다리면서 설레었던 경험들을 나누었다. 지루하고 힘들었지만 그 후에 있을 즐거운 일을 상상하면서 기다리는 것도 행복하다는 말을 했다. 오늘을 사는 우리들은 새로운 결말을 기대하며산다. 흩뿌려진 설경의 평판화 한 점을 덮으며 첫눈 오는 날을 기다려본다.

김헌수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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