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가을, 불우헌 정극인 선생을 생각하며.
이 가을, 불우헌 정극인 선생을 생각하며.
  • 최재용 정읍시 부시장
  • 승인 2022.10.23 14: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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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재용 정읍시 부시장
최재용 정읍시 부시장

정읍이 자랑스러워 하는 불우헌(不憂軒) 정극인 선생은 우리나라 역사문화에 의미있는 발자취를 남기셨다. 가사문학의 효시로 여겨지는 「상춘곡」, 5백년간 지속된 「태인고현동향약」, 세계문화유산 무성서원의 토대가 된 마을 공부방인 「향학당」은 불우헌 정극인 선생을 언급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이다.

시조와 함께 가사문학은 우리 고유의 문학형식이다. 한자로 쓰여 난해한 한시와 달리, ‘시조’는 우리말로 하고 싶은 말과 감정을 아주 간결하게 표현하는 일종의 초단편 시인 것이다. 한편 ‘가사문학’은 시조와 비슷하게 일정한 운율을 갖지만, 한자를 섞은 한글로 일정 주제에 대해 길게 쓴 글이다.

참고로 시조와 가사문학은 우리글이 없던 고려시대에 일정하게 반복되는 후렴구와 운율을 갖고 노랫말처럼 불리다가 조선시대에 와서 한글로 기록되어 전해지는 ‘고려가요’나 그 시대에 암호와 같은 한자 단어로 쓰여진 ‘경기체가’와는 다른 것이다.

불우헌 선생이 쓰신「상춘곡」은 우리나라 가사문학의 출발점으로 여겨지는데, 5백 년 전쯤에 지어진 글임에도 지금 우리가 읽고 이해하기가 어느 정도 가능하다. 그 시절 서당에 다니는 동네 아이나 글을 조금 읽을 줄 아는 동네 사람이라면 이해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다.

불우헌 선생이 75세가 되던 1475년, 당신이 사시던 칠보 고현동 동네 사람들을 초청하여 예의범절에 맞춰 다과를 함께 하고 마을 화목을 위한 동네 사람들간의 약속을 만드는데 이것이 「태인고현동향약」의 시작이다. 이 향약은 5백 년간 그 시기에 맞게 조금씩 내용을 바꿔 시행하다가, 1974에 마지막으로 개정된 향약안을 만들게 된다.

「태인고현동향약」을 통해 불우헌 선생은 세상이 어지럽고 험난할지라도 당신이 사는 마을에서만이라도 서로 예의를 지키고 양보하면서 화목하고 정겨움이 넘치는 일상을 꿈꿨던 것이다. 부끄러움을 모르고 살아가는 지금의 현실에서 우리는 「태인고현동향약」의 본취지를 다시 되짚어 봐야한다.

불우헌 선생은 동네 아이들의 교육에도 정성을 들였다. 돌아가시기 전까지도 세 칸짜리 조그만 집을 짓고 아이들 가르치는 즐거움으로 사셨다. 이런 모습이 조정에 알려져 72세가 되시던 1472년에는 문종 임금이 상도 내리셨다.

불우헌 선생이 돌아가시고 2년 뒤인 1483년에 아이들을 가르치시던 「향학당」이 지금의 무성서원 자리로 옮겨 졌고, 이듬해에는 고운 최치원 선생을 제사 지내던 선현사도 옮겨와 태산사로 고쳐 부르게 됩니다. 그리고 한참 시간이 흐른 1696년에 사액서원으로 지정받으며 무성서원으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불우헌 정극인 선생은 우리에게 참 소중한 문화유산을 많이 남기셨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 불우헌 선생은 지금의 명성에도 불구하고 보통 생각하는 것처럼 어릴 적 천재나 신동이라는 소리도 듣지 못했던 것 같고, 고관대작을 지내지도 못했다. 29세에 생원에 합격하여 성균관에 입학했고, 51세가 되어서야 과거에 합격해 전주 향교의 교수로 첫 벼슬을 시작했다. 그리고 70세에 정6품에 해당하는 사간원 정언을 마지막으로 벼슬을 마무리한다. 지금 우리가 중요시하는 겉모습, 요즘 흔히 말하는 스펙이나 경력만 갖고는 설명이 어려운 것이다.

하지만 「상춘곡」, 「태인고현동향약」, 「향학당」과 무성서원을 곰곰이 살피다 보면 그 속에는 자연, 동네, 그리고 아이들이 중심에 있다는 생각이 든다. 진실함과 소박함, 그리고 순수함이 느껴지는 것이다. 5백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여전히 우리에게 소중하고, 또한 절실한 것들이 아닐까?

최재용 <정읍시 부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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