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록위마(指鹿爲馬)와 대한민국
지록위마(指鹿爲馬)와 대한민국
  • 안호영 국회의원
  • 승인 2022.10.04 15: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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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호영 국회의원
안호영 국회의원

진나라 시황제를 섬기던 환관 중에 조고(趙高)라는 자가 있었다. 조고는 시황제가 죽자 권력을 마음대로 휘두르고자 태자 부소(扶蘇)를 시해하고 어린 호해(胡亥)를 옹립했다. 호해의 눈과 귀를 가리고 권세를 휘두르던 조고는 남은 반대파마저 없앨 계략을 세웠다. 호해와 중신들 앞에 사슴 한 마리를 데려다 놓고선 말이 틀림없다고 우긴 것이다. 대부분은 조고가 두려워 “말이 맞다”고 맞장구를 쳤지만, 의지가 남아 있는 몇몇은 끝내 사슴이라고 답했다. 조고는 사슴이라고 대답했던 중신들에게 죄를 씌워 모두 죽여버렸다. 고사성어 지록위마(指鹿爲馬)의 유래다.

기원전 먼 중국 땅에서 일어났던 행태가 오늘날 대한민국에서 반복되고 있다. 지난달 윤석열 대통령이 바이든 대통령과 만난 직후 박진 장관과 회의장을 걸어 나오면서 욕설을 하는 장면이 언론사 카메라에 담겼다. 정부·여당은 재빨리 ‘사슴이 아니라 말’이라며 국민을 기망하려 들었다.

이튿날 김은혜 홍보수석의 해명이 신호탄이었다. ‘바이든’이 아니라 ‘날리면’이라며, ‘이XX’는 결국 대한민국 국회를 향한 것이라고 밝힌 것이다. 욕설 발언이 동맹에 미칠 파장은 알면서 거짓 해명이 국민 신뢰에 미칠 파장이라고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 굴었다.‘날리면’도 아닌 ‘말리믄’이며, ‘이XX’ 발언조차 없다는 여당 의원의 주장도 등장했다. 윤석열 대통령도 ‘중신’들의 지지와 성원에 힘입어 “‘이XX’ 발언을 했는지 잘 모르겠다”며 고무줄 기억력을 자랑했다.

‘말(馬) 만들기 프로젝트’의 압권은 여당 의원들의 집단행동이다. 대통령의 욕설 장면을 최초로 보도한 MBC에 현직 여당 의원들이 찾아가 조작을 운운하고, 민영화해야 한다며 겁박했다. 다음날엔 기어이 MBC를 고발하며 전 세계 140개국, 60만 명이 넘는 기자들이 참여하는 세계 최대 언론단체 국제기자연맹(IFJ)에서 언론탄압이라는 입장을 내는, 낯뜨거운 상황이 벌어지고 말았다.

더 나아가 윤 대통령의 이번 순방일정은 욕설논란에 더해 조문 없는 조문외교, 바이든 대통령과의 48초 정상회담, 저자세로 얻어낸 일본과의 약식회담이라는 ‘빈손외교’로 귀결된 외교참사 그 자체였다. 미국에서 생산된 전기차에만 보조금을 지급하는 내용의 인플레이션감축법(IRA), 일제강점기 강제징용자 문제의 해결은커녕 논의가 이루어졌는지조차 의문이다. 그럼에도 여당은 더불어민주당이 발의한 박진 외교부 장관 해임건의안 표결에 불참했다. 윤석열 대통령이 이미 거부권 행사를 시사한 상황이었으니 ‘국익보다 윤심’이 우선임을 자백한 꼴이다.

하지만 정부·여당, 그리고 윤석열 대통령이 간과한 점이 있다. 우리 국민은 조고와 그 일당의 꼭두각시에 그쳤던 호해처럼 어리고 어리석지 않다는 것이다. 실제로 국민 여론은 싸늘했다. 광주방송이 의뢰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바이든’으로 들었다는 비율은 61.2%, ‘날리면’으로 들었다는 비율은 26.9%를 기록했다. 대통령실과 여당의 비속어 논란 대처에 대한 평가도 단호했다. ‘부적절하다’는 반응이 75.8%로 그야말로 압도적이었다. 책임지지 않는 대통령에 대한 국정 지지율 역시 취임 후 최저치인 24%까지 떨어졌다.

정쟁과 언론탄압으로 대통령의 잘못을 덮으려 드는 지금, 조고의 말로가 교훈을 남긴다. 악인악과(惡因惡果)라고 했던가, 평생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를 것 같던 조고는 호해마저 죽이고 옹립한 새 황제 자영(子嬰)의 손에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다.

민생을 위해 여야 없이 하나로 뭉쳐야 할 때다. 엄중한 시기, 국민이 큰 무언가를 바라겠는가. 그저 반성과 쇄신이면 족하다. 온 국민을 바보 취급하며 ‘전국 듣기 평가’로 소모적인 논쟁을 벌일 일이 아니라, 당선 직후 “참모 뒤에 숨지 않고, 정부 잘못을 솔직히 고백해 국민들께 이해를 구하겠다”던 약속을 지키면 될 일이다. 윤석열 대통령은 지금이라도 국민에 대해 솔직하게 사과하고, 박진 장관을 비롯한 무능한 외교라인 교체로 책임감을 보이시라.

안호영 <국회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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