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의 언어
시인의 언어
  • 김동수 시인/전라정신연구원장
  • 승인 2022.09.12 14:1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김동수 시인 / 전라정신연구원장<br>
김동수 시인 / 전라정신연구원장

천하만물이 잡화경(雜花境)이다

 

물리학자인 양형진은 『산하대지가 참빛이다』는 책을 내 놓았다. 그는 이 책에서 ‘탁사현법생해문(託事顯法生解門:사물에 의탁해 진리를 드러나게 한다)’이라는 ‘현상의 법신관(法身觀)’을 드러냈다. 이 세상은 온갖 잡화(雜花)들로 장엄한 화엄경이라 했다. 화엄(華嚴)은 불교의 경전인 ‘잡화장엄(雜華莊嚴)’ 곧, ‘온갖 꽃으로 장식한 세계’라는 뜻으로 여기서 말하는 ‘꽃’이란 깨달음의 공덕을 꽃에 비유한 것이다.

세상의 모든 사물과 현상의 이면에는 그 나름대로의 진리가 다 들어 있으니 삼라만상이 곧 부처요 잡화로 장엄한 세계라는 것이다. 그러기에 세상에 아름답지 않은 꽃, 아름답지 않은 생명이 따로 있지 않다는 말씀이다. 일체중생이 서로 어우러져 살아가는 연기적 실상, 그게 바로 이 세상의 모습이요, 우주의 본상이라는 것이다.

석가모니 부처님이 고행 끝에 새벽별을 보고 이 화엄의 세계를 깨달았다고 한다. 세상을 있는 그대로 ‘참빛의 세계’로 볼 수 있는 눈, 일체의 것들을 평등심 속에서 한 몸의 것으로 꿰뚫어 볼 수 있는 눈, 우주에 존재하는 일체 모든 것들이 ‘잡화경(雜花境)’이라는 통찰을 통해 우리 모두가 그 일원으로서 이 ‘잡화경의 축제’에 즐겁게 동참하자는 것이 화엄의 세계요, 잡화경의 세계다.

시인의 안목도 이와 다르지 않다. 소외되고 억압되어 주변부로 밀려나 있는 것들, 그 또한 잡화(雜花)요 화엄의 일원임을 깨달아 그것들의 일체를 사랑으로 재발견하고 보듬어 가는 일이다. 그리하여 시인의 눈에는 세상의 어떤 것도 ‘꽃’으로 보인다. 그렇지 않고서는 좋은 시가 나올 수 없다는 게다. 범부의 눈에 보이는 것과는 달리 그 ‘잡화’들이 각자의 위치에서 각자의 쓰임에 따라 세상을 장엄하고 있다는 깨달음이 진정한 시인의 자세요 안목이라 생각된다.

시(詩)는 언제 어디에서 오는가? 시는 사(私)적인 내(我)가 현상을 넘어, 그 현상적 내(我)가 공(公)이 되고 무아(無我)가 될 때 온다. 나와 나의 감정을 앞세울 때 오는 것이 아니라, 나(我)을 벗어날 때 비로소 시가 온다. 그러기에 시인의 시어는 이전의 언어를 버리고 새로운 언어로 거듭나는 언어, 그야말로 ‘잡어(雜語), ‘잡화(雜花)의 축제’에 참여하여 자기도 잡화(雜花)의 하나가 되어 저잣거리로 나서는 화엄의 화신, 선사(禪師)들의 언어이다.

파편적 존재로서의 소아(小我)가 무너지고, 우주적 존재로서의 전일적(全一的) 자아의 확장이 일어나기 시작하는 데서부터 시작된다. 대상과 세계를 방하착(放下着), 자신을 비워 자아의 실상을 온전하게 인식하여 무아(無我)가 열리는 세계이기도 하다. 떼 지어 몰려다니는 집오리떼의 언어가 아니라, 하늘에 올라 세상을 내려다보는 독수리의 눈이다. 때문에 시인의 언어는 언어의 국경을 넘어 진아(眞我)의 세계로 넘어가는 ‘날개옷(wing suit)의 언어’. 언어를 쓰되 언어를 넘어선 ‘초월의 언어’이기도 하다.

현실에서 비현실로, 각질화된 일상에서 비일상의 세계로, 의식에서 때로는 무의식으로, 사실(fact)에서 진실을 발견하고, 체제와 논리를 떠나 철학적·형이상학적 담론을 감각적 이미지로 대체하면서, 현실 저 너머의 세계를 직조(織造)하는 은유적 언어, 보이는 세계에서 보이지 않는 곳에 존재하는 근원적 욕망을 주문하는 샤먼의 언어, 고통의 현실에서 실존적 해방감을 안겨 주는 치유의 언어이기도 하다.

인간도 육체를 가진 동물이라는 점에서 다른 동물들과 함께 물질계에 속하지만, 언어를 통한 사유와 그에 따른 영적 세계가 있다는 점에서 동물과 구별된다. 그러기에 시인의 언어는 일상적 언어가 아니라 『반야심경』의 ‘아제아제바라아제 바라승아제’(가자, 가자, 저 언덕으로, 우리 모두 함께 넘어가자)에서처럼, 현실의 언덕을 넘어 가는 염불의 언어, 무명(無明)의 번뇌에서 광명의 진리로, 환영(幻影)의 사바계에서 실상(實相)의 극락계로, 중생의 삶에서 보살의 삶으로 건너가자는 ‘아제아제 바라아제’의 진언(眞言)이기도 하다.

김동수<시인/전라정신연구원장>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