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롱박 덩굴처럼 누군가의 사다리가 될 때
조롱박 덩굴처럼 누군가의 사다리가 될 때
  • 이소애 시인 / 문학평론가
  • 승인 2022.07.18 17: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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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소애 시인/문학평론가
이소애 시인/문학평론가

베네치아 태생인 이탈리아의 바이올린 연주자이며, 작곡가인 안토니오 비발디의 곡 <사계>는 오늘을 위한 곡 같다. 긴 장맛비의 여름 멋진 날의 외로움에 폭풍우가 몰려오진 않았어도 장맛비는 전주천을 격렬한 물의 소리로 연주하고 있다. ‘여름 3악장’은 마치 폭풍우가 몰려오고 천둥 번개를 동반하는 시커먼 구름이 사나운 계절이라는 이름표를 달고 바짝 나를 따라오고 있었다. 갑자기 새벽 온순한 비가 빠른 폭우로 변하더니 금방 전주천 물이 내 발밑으로 넘실거린다. 역동적인 ‘여름 3악장’ 바이올린 협주곡은 풀밭을 질주하며 물오리 가족들에게 덤벼들 듯 난폭해지기도 한다.

장맛비 사이사이로 슬며시 언뜻언뜻 보이는 어머니의 모습이 보인다. 세계에서 가장 큰 나무가 있는 세쿼이아 국립공원의 자이언트 세쿼이아 숲속에서 3천 년 살아온 나무가 놀라게 했을 때처럼 어머니의 한 뼘 공간도 축구장 대여섯 개 맘먹는다. 수세미와 조롱박이 여름 햇살에 성장하는 생명력은 어머니를 닮았다. 수세미와 조롱박을 보고 어머니의 까칠까칠한 손이 내 등짝에 바가지로 물을 퍼서 문질러주는 시원함을 바람이 기억을 몰고 왔다.

해마다 앞마당에서 조롱박을 키우셨다. 나일론 끈을 처마 밑으로 거미줄 치듯 엮어 덩굴이 감고 올라갈 수 있도록 했다. 덩굴은 굴러떨어지거나 서로 엉켜 말라비틀어지는 일이 없이 어머니 마음을 늘 기쁘게 했다. 가을을 기다려 조롱박을 표주박 바가지로 만드셨다. 어김없이 예쁜 바가지를 가지고 오셔서 풍성한 가을을 놓고 가셨다. 바가지에 가득 용돈을 채워 드려야 할 딸은 어머니 나이가 들어서야 빈 바가지의 외로움이 보였다.

덩굴은 높은 곳까지 오를 수 있지만, 혼자의 힘으로 오를 수 없는 나약함이 보이는 여름이다. 덩굴이 감고 뻗어나갈 수 있도록 나일론 줄을 칭칭 감고 여름을 나는 조롱박 덩굴에 냉커피라도 건네주고 싶다. 햇볕에 부데끼고 바람에 견디며 조롱박으로 불러주기를 기다린다.

광주 도심 가로수에 둥지를 틀고 사는 왜가리 난민들을 보라. 인간의 욕구 충족을 위해 삶의 터전을 빼앗긴 왜가리들은 경제적인 여건에 내몰리는 사람과 다를 바 없다. 왜가리처럼 큰 새가 쉴 수 있는 공간이 점점 사라지듯 독거노인이 살 곳도 사라진다. 멋진 나이 듦을 준비하기 위해 손가락을 접으며 계획을 세워도 가까운 가족은 더 멀리 무관심해진다. 소소한 애로사항을 들어 줄 사람이 없다. 점점 혼잣말로 목구멍에서 맴돌 뿐 세대 간 거리는 안개 속이다.

손가락 마디가 나무 옹이같이 두꺼워지고, 숲속 계곡처럼 패인 얼굴의 주름살에는 눈물이 가물지도 않고 흐른다. 자신의 외로움을 견디지 못하고 나무에서 툭 떨어진 낙과처럼 사는 사람들을 생각한다. 그들의 사다리가 되어 줄 마음을 키우기 위한 강한 체력이 아쉽다.

프랑스 시인 보뱅은 ‘단 한 편의 시라도 주머니에 있다면 우리는 죽음을 걸어서 건널 수 있다. 읽고, 쓰고, 사랑하는 것이야말로 우리를 구원하는 삼위일체다.’라고 한다. 시를 읽다 보면 화자는 마법처럼 나 자신이 되어버리는 경험을 한다. 시가 나이 듦의 절망에서 두레박으로 건진 우물의 기적을 만든다.

달맞이 꽃봉오리가 터지는 꽃의 소리를 생각은 잠자리채로 건질 수 있는 행운이 있을 것이다. 강아지풀이 한가로운 틈새로 들어와 입술 위로 콧수염이 되어 주는 기쁨도 사다리가 되어 주는 일이다.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김지수 지음)에서 어둠의 손목을 쥐고서 매일 밤 죽음과 팔씨름을 한다는 마지막 수업을 읽으며 한 치의 어긋남 없이 살다 가신 그분의 삶에 부끄러움이 밀려왔다.

“나무들이 흔들리는 것도 원래의 자세로 돌아가기 위함이다. 바람이 없는 날에도 수직의 중심으로 가기 위해 파동을 만들지. 그게 다 살아 있는 것들의 힘이다.”라며 촛불은 수직으로 타지 않고 좌우로 흔들리며 타는 이유도 중심으로 돌아가기 위함이라고 한다.

파도는 아무리 높게 일어나도 항상 수평으로 돌아간다는 건 고통은 지나가는 시간의 초침과 같다는 의미로 받아들였다. 내 곁의 사람들은 모두 사다리가 되어 줄 거라는 꿈으로 오늘을 즐긴다.

이소애<시인 /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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