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수필] 슬픔은 무효기간도 유통기간도 없다
[독자수필] 슬픔은 무효기간도 유통기간도 없다
  • 정성수 시인
  • 승인 2022.07.10 09: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정성수 시인

 슬픔은 형체를 드러내지 않는 공기처럼 우리 주위에 서성이다가, 이내 가슴 깊은 곳까지 파고든다. 독일 시인이자 소설가인 안톤 슈낙(Anton Schnack(1892~1973)은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이란 글에서 자신을 둘러싼 자연과 삶을 통한 다양한 모습에서 슬픔과 애상을 느낀다고 했다. 또한 조선 시대 성리학의 사단칠정四端七情론 중 사단四端에도 측은지심惻隱之心이 있고, 칠정七情 중에 애哀가 포함된 것만 보아도 슬픔은 인간의 대표적인 심성 중 하나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칠정七情 ‘희로애락애오욕喜怒哀樂愛惡慾’의 감정들도 시간이 지나면 사라지고, 때로는 이것에서 저것으로 바뀌어 변화무쌍하다. 특히 사람의 마음에 남아 있는 슬픈 감정이 오래가는 것은 누군가에게 받은 상처에 대한 평정심을 잃고, 충격의 여파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기 때문이다. 슬프디는 생각이 ‘처음에는 노여움에 의한 사실의 부정으로부터 시작해서 현실을 받아들임과 동시에 복받치는 감정을 통제하는 데는 상당한 시간이 요구된다.

  모든 슬픔의 진원지는 바로 집착이다. 집착이 클수록 슬픔도 크다. 슬픔이 싫다면 집착을 버리거나 갈애渴愛를 줄여야 한다. 오욕五慾에 빠져 지나치게 좋아하고 사랑하는 데서 문제가 발생한다. 갈애를 줄이지 않고는 슬픔 없는 삶을 살 수 없다. 하지만 슬픔을 겪은 사람은 타인의 슬픔에 공감할 줄 알며, 반응할 줄 알고, 위로할 줄도 안다. 그래서 슬픔은 인생의 실패나 삶에서 받은 상처를 떨고 다시 일어설 원동력이 된다.

  슬픔을 모르는 사람은 많지 않다. 이유 없이 장기간 슬픈 경우, 아예 슬픔을 배제해 버리면 오히려 그 상처가 곪아 증오나 분노 같은 감정으로 바뀌어 적응할 수 없는 고통이 따른다. 슬픔 또한 어느 정도 받아들여야 건강한 삶을 살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가 외면하고 싶은 슬픔은 사라지는 걸까? 그것은 형체를 가졌다가 서서히 사라지는 드라이아이스처럼, 우리의 일상에서 완벽하게 증발하지 않는다. 슬픔은 감정의 반응이므로 자신이 이겨 낼 수 있도록 지켜봐야 한다. 동물들이 자신의 상처를 혀로 핥는 것처럼 우리도 마음의 상처를 스스로 돌보고 치유해야 한다. 그것은 슬퍼도 꾸역꾸역 먹어야 하는 밥이고, 고단한 육신을 보듬어주는 잠이다. 인간은 동물과 달리 자신의 우울한 정서를 이해하고 서로 위로하며 때로는 함께 극복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다. 그것은 공감이며 동반이다.

  슬픔은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정서 가운데 최고이고 동시에 모든 예술의 전형이요, 시금석이라고 한다. 그래서 슬픔은 궁색한 현실이나 외롭고 쓸쓸하다는 삭막한 조건으로 슬퍼진다. 이처럼 세상은 보이는 대로 보는 것이 아니라 보는 대로 있는 존재하기 때문에 슬픔도 절대적으로 고정된 것이 아니라 감정의 주체가 어떤 처지에 있는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가? 어떤 관점으로 대상을 바라보는가? 에 따라 감정의 강도는 달라진다.

  슬픔은 나누어 가져야 한다. 대립과 탐욕의 사회에서, 이기주의가 만연한 삶에서, 상처받는 인간관계에서 슬픔에 귀를 기울이고 따뜻하고 부드럽게 감싸 안아 줄 때 위로받고 치유될 수 있다. 그것이 바로 타인의 슬픔에 대한 예의다. 인생이 우리에게 가르쳐 준 교훈 하나는 슬퍼할 때가 있어야 기뻐할 수도 있다는 진실이다. 더 이상 어두워지지도 다시 밝아지지도 않는 심란한 저녁, 슬픔은 밥을 먹고 수다를 떨고 잠을 잔다. 손가락 사이를 빠져나가는 허망한 꿈을 꾸면서… 슬픔은 무효기간도 없고 유통기간도 없다.

글 = 정성수 시인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