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의 미술을 통한 반성과 대비의 기회
신라의 미술을 통한 반성과 대비의 기회
  • 임보경 역사문화원 대표
  • 승인 2022.06.30 14: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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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보경 역사문화원 대표
임보경 역사문화원 대표

6월 장마가 시원하게 하룻밤을 뿌려줬다. 멀리 아침마다 걷는 요즘시대의 섶다리가 물에 잠길 듯 말듯 넘실대며 손사래를 친다. 베란다 오이넝쿨은 바람에 쓰러지지 않으려 속넝쿨자락을 줄에 찰싹 달라붙여 힘을 주어 그네를 타고 있다. 자연의 현상에 각자 너름의 아침 풍경을 맞이하는 모습 또한 하루 시작의 작품으로 보인다.

3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있는 우리나라는 한 면은 대륙과 연결된 반도국가의 지리적 위치와 관계적 위치에 속한 나라이다. 그래서인지 외세의 침입이 많았고 다양한 문화를 수용할 수 있는 국제적 보편성을 가질 수 있는 장점의 나라이기도 하다. 환태평양 조산대에 가깝게 자리한 한반도는 엄청난 두려움의 대상인 지진의 공포감은 옛 선조들에겐 국가의 생사 여부였을 것이다. 이런 자연의 위협적 분위기 속에 현 세상을 잘 극복해 나간 통일신라의 작품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땅에는 많은 보물이 있다. 삼국시대만큼은 고대국가의 기틀을 마련하고자 법체제를 만들고 공복을 제정하며 하나의 통일체제를 완성하고자 불교를 수용하여 종교적 의미보다는 통치자의 사상적 기반으로 활용하였다. 그들은 땅의 보물을 서로 차지하고 뺏기기를 수십차레 반복하며 각자의 문화를 주고 받으며 성장하는 모습을 보였다. 여기에는 고구려, 백제, 수나라, 당나라의 문화를 섭렵하여 독특한 문화로 승화시킨 통일신라의 문화가 돋보이는 것은 위협적인 지진을 인간의 힘으로 막을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여러 미술작품에 극복해 나가는 지혜로 표현되어졌다는 것이다.

“부처의 나라”라는 이름을 가진 불국사는 청운교와 백운교의 33계단을 올라서면 자하문이 열린다. 과거도 미래도 아닌 현세를 중요시한 그들에겐 대웅전 앞마당 동서 방향에 일정한 거리를 두고 법화경의 말씀을 그대로 옮겨 놓은 석가탑과 다보탑이 시대와 염원을 담은 미술작품으로 재현되었다. 아사달과 아사녀의 가슴 절절한 안타까운 사연을 안고 천년을 지켜온 무영탑(석가탑)은 탑신부와 옥개석이 그림자처럼 연못에 드리워지길 복원작업에서 아사녀의 간절한 염원을 이해하지 못했다. 아쉬움 반면에 장중하고 엄숙한 석가탑은 세게에서 가장 오래된 목판인새본인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을 비단에 꽁꽁 싸인 채 선물로 보답하기도 했다. 최고의 전성기를 이룬 통일신라 중대시대는 민족 융합과 민족 문화를 통일할 뿐만 아니라 전국적인 두려움의 대상인 지진의 위기도 공동체의 운명으로 이겨내야 했다. 그런 염원을 통치자도 백성도 일심의 정성을 쏟아 극복하려 했던 모습들은 불국사를 건립하는 과정에서 아낙네들의 쌀 1되씩 시주하는 정성에서 헤아릴 수가 있었다. 그리고 지진에 대비하는 신라인의 건축물의 구조는 석가탑의 “묵서지편”에서 언급한 그랭이 공법에 놀라웠다. 자연석(암반)을 그대로 놓은 채 그 위에 돌을 깎아 쌓아 올린 고구려의 그랭이 공법에 돌못을 사용하여 외부의 충격과 땅의 흔들림에도 쌓여진 돌과 석추가 이탈하는 것을 막고 에너지를 차단하는 공법은 요즘시대의 내진설계와 같은 기능이었다. 또한 수용적인 자세와 자국만의 독특한 기법으로 승화시켰다는 점이다. 비녀석과 장자석을 갖춘 첨성대의 내진설계도 360여 개가 넘는 돌을 그냥 쌓아 놓은 게 아님을 증명하는 사례이기도 하다.

토함산 아래 과학과 균형미의 비율을 갖춘 인공석굴인 석굴암의 주실과 전실의 구조에서도 시대적 고민을 본존불의 소리없는 미소의 자비로 대변했다.

나라와 백성의 평안과 안녕을 위해 많은 은덕을 베푼 통일신라 성덕대황의 업적을 기억하기 위해 만들어진 성덕대왕 신종은 한동안 고물취급을 받았던 시대의 부끄러움이 있었다. 아기를 넣어 종을 탄생하게 한 아이와 엄마의 애절한 원망과 용서의 바람을 안고 있는 에밀레의 “엄마..엄마… 엄마때문이야”로 해석한 근대시기의 미국 선교사 헐버트의 관심 등은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게 하는 좋은 예이기도 하다.

삼국시대에는 100회, 고려시대는 190여 차례 그리고 조선시대에는 2천여 회나 있었던 지진의 진동은 우레치는 소리 또는 북치는 소리로 비유되며 옛 선조들의 심장을 오그라지게 하였다. 그리고 하늘의 경고로 받아들인 그들은 가까운 나라의 침입을 받았거나 왕이 죽었거나 시중을 교체했다는 기록을 남겼다. 또한 통치자는 궁궐을 짓거나 일심으로 극복할 문화사업과 백성에게 선정을 베풀었다는 것은 우리에게 생각의 시간을 갖게 한다.

아름다운 미술작품 속엔 분명 그 시대가 말하고자 하는 이야기가 있다. 8세기 신라인들이 지진의 시대데 살아가는 모습에는 정치적 반성의 기회와 대비의 기회로 삼아 공동체 운명의식으로 1,200년의 세월을 지켜 온 자세를 새겨보는 기회가 되었으면 한다.

임보경 <역사문화원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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