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F 외환위기와 조선산업
IMF 외환위기와 조선산업
  • 신원식 정무부지사
  • 승인 2022.06.12 14:43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신원식 정무부지사
신원식 정무부지사

필자가 S중공업에서 재직한 1997년 말, 우리 경제가 대외 부채증 가와 외환보유고 고갈로 금융위기 상황을 맞았다. 당시 회사에서 영업 지원업무를 담당하고 있었는데 해외선주들을 만나면서 1997년 9월경부터 이미 우리나라 경제에 심각한 문제가 발생하고 있다는 것을 직감했다.

조선 비즈니스의 경우 배 한 척이 통상 500억원, 건조 기간이 2년 정도 걸리는데 해외 선주로부터 선박 건조계약을 따게 되면 일반적으로 100억원씩 5회에 걸쳐 분할 지불받는 입금조건을 가지고 있다. 이때 회사에서는 현금이 입금될 때마다 이에 상응하는 환급 보증서(Refund uarantee:RG)를 산업은행이나 수출입은행으로부터 발급받아 선주에게 제시해 주어야 한다. 선박을 건조하다가 무슨 이유에서든지 중단하거나 계약대로 이행을 못할 경우 선주는 RG를 발급해준 은행에 제시하고 그간 회사에 지불했던 선수금을 환급받아 가도록 하는 제도이다.

그런데 1997년 9월경부터 해외 선주들이 한국계 은행이 발급하는 RG를 거부하고 외국계 은행이 발급한 보증서만을 요구했다. 당시 우리나라 국책은행들의 대외신용도는 B급 수준으로 하락해 받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RG업무를 맡은 필자는 이 같은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엄청난 고민으로 밤잠을 이루지 못했다.

필자는 무작정 미국으로 떠났다. 1998년 3월 미국의 뉴욕시 월가에 도착해 세계 유수의 은행과 보험회사를 다 뒤져 별스러운 아이디어를 내고 수없는 상담을 진행했다.

필자가 월가에서 한창 보험사, 은행 등과 상담으로 바쁜 일정을 보내고 있는 가운데, 서울 회사 대표이사로부터 “그만 귀국하라” 는 전화를 받았다. 이에 필자는 “이런 난국에서 저라도 뛰어들지 않으면 우리 조선소는 어떻게 되는 겁니까? 저는 사표를 낼 각오로 해결해 볼 테니 조금만 더 시간을 주십시오”라고 답하자 대표 이사께서도 이에 공감해주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임원이 자기에게 주어진 불가능한 임무를 기필코 성취하고자 하는 의지를 회사가 믿고 기다려 주었다는 것이며, 이 점에 대해 필자는 지금도 고맙게 생각하고 있다.

결국 꼬박 45일간의 체류 끝에 선주로부터 선수금을 받아 보험회사와 S중공업간 공동 구좌에 맡기고 거제조선소 공장부지까지 담보로 잡히는 빅딜(Big Deal)을 통해 RG발급의 물꼬를 트게 되었다. 매일매일 피말리는 협상과 계약서 작업을 진행한 끝에, 세계 최초로 은행 보증이 아닌 (AIG) 보험회사 보증(Surety Bond)을 선박환급 보증에 적용시키는 신상품을 개발해냈다.

이러한 활약으로 그해 4월 중순부터 다시 S중공업은 조선 수주계약을 끌어낼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보험사의 보증서 제도를 모든 한국 조선사들에게 아무런 대가 없이 사용할 수 있게 풀어 주었다. 97년에 한국의 조선 수주량이 201척이었는데 98년에 175척으로 줄었다가 99년 227척으로 다시 늘어난 통계수치가 이 때의 수주상황을 말해준다.

조선 분야의 해외 수주 재개는 우리나라가 2001년 8월 IMF 외환위기를 벗어나게 되는데 크게 기여했다고 생각한다. 1998년 봄, 월가에서의 45일간은 필자가 지금까지 공직이나 사기업에서 경험 했던 일 중 가장 큰 보람으로 남아 있으며 ‘나라 경제에 귀중한 외화벌이에 나도 보탬이 되었구나!’ 하는 생각에 지금도 가슴이 벅차다. 선거 정치의 속성은 정해진 파이 하나를 놓고 참가자들끼리 서로 경쟁해서 그중 한 사람이 독식하는 제로썸(Zero-Sum) 게임이라고 한다면, 비즈니스의 속성은 게임 참가자들끼리 서로 경쟁도 하지만 협력한다면 시장이라는 파이의 크기를 더욱 확대하여 윈 윈할 수 있는 플러스썸(Plus-Sum) 게임으로 만들 수 있다는 묘 미가 있다. 지난 2월24일 H중공업 군산조선소의 재가동 협약식이 체결되던 날 필자는 남다른 희망을 또 하나 품었는데, 앞으로 군산조선소가 K조선산업의 경쟁력 강화와 재도약에 기여하여 지난날처럼 세계 제1의 조선국가의 위상을 되찾기를 바라는 것이었다.

신원식 <전라북도 정무부지사>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