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의 독립운동가 - 안경근, 이덕주, 최흥식 선생
6월의 독립운동가 - 안경근, 이덕주, 최흥식 선생
  • 전북동부보훈지청
  • 승인 2022.06.07 1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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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람을 죽여 만 사람을 살리며 광복을 향한 위대한 걸음을 내딛다

  한인애국단은 김구선생이 임시정부에서 독립운동의 새로운 돌파구를 마련하기 위해 결성한 단체로 이덕주, 최흥식 선생의 의거는 실패했지만 독립운동의 의지를 많은 곳에 알린 중요한 의거였다. 

  이덕주 선생은 24살에 한인애국단에 가입하였고, 단장인 김구 선생이 주장한 독립 의지를 세계 각국에 알리고 임시정부의 재정확보에 도움이 되기 위해서는 먼저 조선총독을 처단해야 한다는 내용에 공감하고 그 제안을 수락하였다. 

  그러나 이미 그를 예의주시하던 신천경찰이 이덕주가 신천여관에서 거주 불명의 인물과 만나자 2명을 붙잡아 취조 중 조선총독 처단 준비 사실을 발각하면서 의거는 결국 실패로 돌아갔다.  

이덕주 공판기사(동아320719)

  이후 이덕주는 1932년 7월 해주지방법원에서 소위 ‘살인예비, 치안유지법, 총포화약류취체령 위반’으로 징역 7년형을 언도받았다. 1935년 2월 12일 까지 해주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최흥식 선생은 20살에 독립운동이라는 큰 포부를 가지고 중국 망명을 결심하였다. 최흥식이 단장 김구를 만나 특무작전을 제안받은 것은 1932년 2월경으로, 관동군 사령관등을 처단하라는 비밀 지령을 받았다. 

  하지만 거사일을 이틀 앞둔 1932년 5월 24일, 최흥식이 일경에 붙잡히면서 결국 추진되지 못하였다. 이후 최흥식은 대련법원에서 징역 10년 형을 판결받고 여순감옥에서 옥고를 치렀다.  

  안중근 의사의 4촌 동생이기도 한 안경근은 1918년 가족 모두 국내에 남겨둔 채 블라디보스토크로 망명, 독립운동에 투신하였다. 

  1931년 말 한인애국단이 결성되자 단원으로 참여했으며, 1932년 4월 29일 윤봉길 의거 후 중국국민당 정부가 단장 김구에 대한 지원을 강화하자 그를 보필하면서 김구와의 인연을 이어나갔다.  

  윤봉길의 상해의거를 결실로 중국 측의 지원을 받아 1934년 2월 중국 중앙육군군관학교 낙양분교 내에 한인 특별반이 설립되자 안경근은 생도계를 맡았다.‘제2, 제3의 한인애국단원을 길러내기 위해 노력한 것은 물론, 김구 직계 가족의 연락・소통 및 김구와 동행하며 그의 신변 경호업무도 함께 수행한 것으로 보인다.  

  항일 특무활동도 병행하였다. 1933년 5월 남화한인청년연맹 단원들과 협력하여 일제 밀정노릇을 하던 안공근의 처조카 이종홍을 처단한 사례가 대표적이다.  

  주로 김구를 보필한 안경근은 임시의정원과 임시정부에서도 활동을 이어나갔다. 제29회 임시의정원 회의에서 ‘황해도 의원’으로 임명되었다. 1947년 7월 16일 임시정부는 국무회의에서 대일 군사활동을 지도할 기구로서 군사위원회를 조직하였는데, 그는 9명의 군사위원 중 한 사람으로 선임되기도 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들의 공훈을 기려 안경근 선생에게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하였고, 이덕주 선생에게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최흥식 선생에게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각각 추서하였다.

 
 전북동부보훈지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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