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일락 향기가 아름다운 5월 앞에서
라일락 향기가 아름다운 5월 앞에서
  • 정영신 前전북소설가협회 회장
  • 승인 2022.04.26 1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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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영신 전 소설가협회 회장
정영신 전 소설가협회 회장

근무하는 직장이 가야산 산자락 아래에 있다. 좌청룡(左靑龍) 우백호(右白虎)라 했던가. 풍수적으로 명당이라고 한다. 동쪽 산자락 아래에 커다란 종각이 있고, 속리산 정이품 소나무의 자손이라는 내 키만큼 자란 명문가문의 기백이 보이는 키 작은 소나무도 있다. 풍수적으로 이 터는 자미원(紫微垣)이라고 한다. 자미원은 고전에서 하늘의 중심지이며 옥황상제가 사는 곳이라는 상서로운 길지(吉地)라고 한다. 그래서 이 길지에서 분명히 나라에 공을 세울 큰 인물이 나올 거라고 믿으며 역대 대통령의 동상이 운동장 정면에 나란히 서 있다.

하지만 높은 산자락 아래에 위치하다 보니 평균 온도도 조금 낮고 여름과 겨울 방학이 되면 학생들이 대부분이 집으로 돌아가기 때문에 주변이 적막하다. 산도 있고 골짜기에서 흘러 내려오는 계곡물도 있어서 야생 고양이들이 여기저기에서 새끼를 낳고 기르며 살고 있다. 어느 여름 장마철이었다. 소나기가 쏟아지던 날, 야생고양이가 학생들도 대부분 집으로 가고 쓰레기통도 텅 비어 먹을 게 없었는지 잣나무 아래 풀숲에서 고개만 내밀고는 도망가지도 않고 내 눈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더 가까이 가보니 며칠 굶은 건지 배가 홀쭉했고 놀랍게도 그 곁에는 새끼 고양이 두 마리가 엄마 가슴에 안겨 마른 젖을 애써 짜 먹고 있었다. 너무도 안타까웠다. 이대로 며칠 더 굶게 되면 모자 가족이 오래 살지 못할 것 같았다. 그래서 그날 바로 고양이 사료를 사다가 플라스틱 쓰레기통을 뉘어서 비가 맞지 않게 그 안에 밥과 물을 놓아 주었다. 그렇게 고양이 가족과 인연을 맺었다. 엄마는 검정과 흰색털이 섞인 얼룩이고 아이들은 노랑이와 검돌이다. 보통 조금 자라면 먹이가 부족해지기 때문에 엄마고양이가 아이들을 내보내는데, 노랑이는 끝까지 엄마 옆에서 함께 지냈다. 그러니까 동물들도 절대로 떨어지지 않고 자신을 따르는 자식은 버리지 않았다.

엄마 고양이는 한철에 한 번이나 두 번씩 새끼를 낳았다. 3개월이 지나면 엄마는 아이들을 데리고 세상 밖으로 나와 먹이 구하기 등 교육을 했고 몇 달 더 자라서 혼자서도 생활을 할 수 있는 청소년기쯤 되면 그 아이들을 데리고 어디론가 사라졌다가 며칠 만에 돌아왔다. 엄마는 아이들을 다른 곳에 독립시켜 주고 오는 것 같았다. 그래도 노랑이는 몇 년이 지나도 엄마 곁에 있었다. 그렇게 한 7년을 살았다. 보통 야생고양이들은 오래 살아야 3년쯤 산다는데 그들이 다니는 길목에 우산도 씌워놓고 밥과 물을 놓아두니 더 오래 산 것 같다. 야생고양이들은 2월이나 3월이 되면 영역 다툼이 제일 심하다. 그래서 내가 나무 밑에 밥을 놓아주어도 더 힘이 센 고양들과 자주 싸우기도 하고 그 힘에 밀리면 언덕 아래 길 건너 다른 마을까지 쫓겨 갔다가 며칠 만에 여기저기 다쳐서 오기도 한다.

그 엄마 고양이는 잦은 출산으로 탈진되어 뼈만 앙상하게 남아 제대로 먹이도 먹지 못하는 상태에서 내게 마지막 인사인양 찾아왔다. 엄마 고양이는 축 늘어진 채로 겨우 숨만 내 쉬면서 한나절쯤 노랑이와 함께 풀숲에 누워 있다가 해질 무렵 어디론가 사라졌다. 그리고는 더이상 나타나지 않았다. 사람처럼 내게 고맙다고, 보고 싶었다고, 많이 아프다고, 너무 힘들다고, 한마디 한 적이 없지만, 마지막 인사를 하기 위해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갈 듯이 끅 끅거리면서도 겨우겨우 걸어서 내게 찾아와 마지막 인사를 하고는 소리 없이 떠났다. 엄마 고양이는 그동안 밥을 준 나의 진심과 사랑에 대해 잊지 않고 마지막 인사로 내게 그 사랑을 돌려준 것이다. 내가 그 엄마 고양이를 많이 찾고 슬퍼할까봐 그렇게 찾아와서 고마웠다며 마지막 인사를 한 것이다.

이 세상에는 보이지 않지만 믿게 하는 것들이 있다. 그것은 진심이다. 그것은 사랑이다. 진심과 사랑은 절대로 배신하지 않는다. 조금 시간이 걸릴 뿐이다. 은혜를 갚을 만한 상황이 되지 못해서 조금 늦어지고 있을 뿐이다. 그처럼 말 못하는 야생동물도 몸으로 찾아와 고마웠다고 마지막 인사를 하고 떠나간다. 생각할수록 참으로 신기하고 오묘한 일이다.

어린이의 달, 가족의 달, 5월이 다가오고 있다. 가족에게 받은 사랑, 친구에게 받은 사랑, 스승에게 받은 사랑 또는 생각한 적도 없는 그 누군가에게 받은 그 사랑을 향해, 연보랏빛 라일락 향기가 아름다운 이 5월을 맞이하여 ‘고마웠습니다’라고 진심 어린 메시지라도 보내보자. 붉은 들장미 향기가 온 누리에 피어나는 신비롭고 황홀한 5월 앞에서, 그래도 언어와 문자로 문명생활을 하고 있는 만물의 영장 우리가. 이처럼 눈부시게 아름다운 꽃의 계절 5월에 어느 날 내게 ‘고마웠다’고 한 마디 전해 올 그 누군가를 위해 진심을 다해 작은 사랑이라도 베풀며 살아보자.

정영신<前전북소설가협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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