징검다리 건너듯 기억이 나를 본다
징검다리 건너듯 기억이 나를 본다
  • 이소애 시인/문학평론가
  • 승인 2022.03.24 15: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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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소애 시인/문학평론가
이소애 시인/문학평론가

기억 속에 시간이 존재한다. 우리에게 시간은 숫자에 불과하다. 시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기억에서만 존재한다. 한 치의 양보도 없는 시간은 사람에게 인식시키기 위한 수학적인 존재이다. 나의 하루를 지배할 커피 향의 전율은 나의 실존을 알린다. 커피를 마실 때 기억이 어떻게 무엇으로 되살아나느냐에 따라서 과거가 커피잔을 비워간다. 커피 맛은 누구와 마셨느냐가 기억의 맛을 좌우한다. 행복의 척도는 기억이 나를 보면서 조금씩 저울 눈금으로 다가온다.

점차 개성과 특징을 잃어가면서 말하는 능력마저 잃고 살아가는 부부의 모습이 담긴 책이 떠올랐다. 『게르트너 부부의 여행』(주)출판사 클은 치매에 걸린 아내와 함께 떠난 노부부의 마지막 여행을 사진으로 기록한 책이다. 기억이 나를 부를 때 응답할 수 있는 능력이 얼마나 소중한가를 말해 준다. 팔다리 상처의 아픔을 기억하지 못하고 자기 의사를 수첩에 짤막한 문장을 남기고 떠난다. “내 곁에 있어줘.”를 세 번 반복해서 쓴 글이 남편에게 꼭 하고 싶었던 마지막 절규였으리라.

기억이 나를 인식하지 못할 때 나는 내가 아니다. 왜냐하면 과거는 기억이 만들기 때문이다. 그 기억 속에 존재하는 시간이 나를 끌고 다니는 공간에 내가 살고 있다. 사람이 시간에 맞추어 살지 않으면 시간이 사람을 노예처럼 혹독하게 부린다.

칼이나 호미, 괭이자루 속에 틀어박힌 뾰족하고 긴 슴베처럼 시간에 끼워 맞추며 살아왔던 과거를 기억해 내지 못하면 게르트너 부인처럼 정지된 공간과 시간에 생명이 붙어살거나 버려진다.

쫑긋쫑긋 초록 잎 틈새로 고개 내민 꽃들. 숨소리도 아주 작은 풀꽃이 혼자 걷고 있는 외로움으로 말을 걸어온다. 이름을 불러달라는 소리였다.

전주천 징검다리를 휘돌며 흐르는 시냇물 소리가 정겹다. 건너편 저쪽에서 마타리꽃을 손에 쥔 소년이 징검다리를 뛰어올 거라는 생각이 떠오르자 얼굴이 화끈거렸다. 소설 속 소녀가 기억을 보고 있을 기쁨이다.

“개울물에다 손을 잠그고 물장난을 하는 소녀”황순원의 『소나기』가 징검다리 한가운데에 앉아있다. 조약돌 하나 집어내어 팔짝팔짝 징검다리를 뛰어 건너가는 소녀가 내 안에 들어오는 풍경 속에 행복이 찾아드는 공간이 나의 소유물이다.

소설이 정신적으로 풍요로움을 주는 순간이다. 소년이 들국화, 싸리꽃, 도라지꽃을 꺾어 소녀의 마음을 물들이듯 내가 서 있는 땅에서 초록의 숨소리를 귀담아 보는 여유로움이 기쁨을 준다. 내가 존재할 때 우주가 존재한다.

마치 개울둑에서 소녀의 분홍 스웨터 앞자락에 물들일 야생화가 있을 것 같은 환상으로 멈칫 시간을 정지시켜본다. 등 굽혀 자세히 살펴보는 순간은 청춘이 흥건히 스며든다.

쇠백로가 강물을 깨운다. 강물은 고요한 물결무늬를 일으키며 새벽이 아침으로 흐른다. 사방을 두리번거리다 날개를 펴고 징검다리 위로 뱅뱅 돈다. 하늘이 쇠백로의 날갯짓을 평화로운 색으로 캠퍼스에 옮긴다. 잔잔하고 고요한 물결의 음률이 곱다. 두 손바닥 오므려서 맑은 시냇물 한 움큼 떠주고 싶은 사람과 징검다리를 건너는 환상의 공간에 솔솔바람이 불어온다.

봄까치꽃, 깜밥나물, 큰개불알꽃이 내 곁을 삥 둘러 피었다. 분명히 텃밭에서 꽃을 피웠다면 뿌리째 뽑혀 담장 밖으로 던져버렸을 잡풀이다. 강둑에 핀 광대나물꽃이 금방 어깨를 덩실거리며 춤출 것 같다. 코딱지나물은 논두렁이나 밭두렁에 쪼그리고 앉아서 나물을 캐던 시절의 내가 나를 본다. 웃음이 저절로 나오는 보리뱅이가 흰 꽃으로 유혹하는 곁으로 까치가 폴짝폴짝 걸어간다. 자줏빛 긴 잎자루와 잎가장자리가 우글쭈글한 소리쟁이는 흔해서 쳐다보지도 않았는데 이름을 불러보고 만져도 보는 여유가 물소리에 섞여 흐른다. 아래로 낮은 곳으로 쉼 없이 간다.

이쪽과 저쪽을 이어주는 징검다리 한가운데 앉아서, 바람과 햇살에 물든 시적 언어를 붙잡고 시를 초대해 보는 나를 기억하겠다. 하얀 구름 두어 평을 기억에 담아 보는 순간이 행복이라 한다.

징검다리 사이로 청둥오리 가족이 은빛 물결을 만든다. 오늘은 개울물, 시냇물이라고 불러주고 싶은 기억이다. 광대나물이 어깨춤을 신나게 추며 광대처럼 덩실대고 싶어지는 기억이 나를 본다.

이소애<시인/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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