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향약, 500년의 약속은 지속가능한 발전전략이었다
마을향약, 500년의 약속은 지속가능한 발전전략이었다
  • 최재용 정읍시 부시장
  • 승인 2022.03.13 14: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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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재용 정읍시 부시장
최재용 정읍시 부시장

우리는 학교에서 향약에 대해 배웠습니다. 덕업상권, 예속상규, 과실상규, 환난상휼이라는 네 가지 실천덕목을 자율적으로 실천하고자 만든 마을공동체의 약속입니다. 그리고 퇴계 이황(1501~1570)이 만든 예안향약, 율곡 이이(1536~1673)가 만든 해주향약을 향약의 대표 사례로 배운 것입니다.

향약은 중국 송나라 때인 1076년에 여씨 4형제가 섬서성 남전(藍田)현에서 여씨향약을 처음 시행했다고 합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도록 시행된 향약은 오늘날 정읍 칠보면 시산리와 무성리 일대의 마을(당시에는 옛날 현의 관아가 있던 곳이라 고현(古縣)으로 불림)에서 시행한 「태인 고현동 향약」입니다. 불우헌 정극인선생(1401~1481)은 우선 조그만 마을 글방을 만들고 마을 모임을 조직한 후, 드디어 1475년에 향음주례라는 마을공동체 행사를 시작으로 향약을 시행합니다.

1475년 처음 만든 마을공동체의 약속을 담은 향약은 동안(洞案), 동계안, 동중좌목, 동계좌목, 태산향약안, 고현향약안, 고현향약규례 등 다양한 이름으로 계속 이어지다가 마지막으로 1974년 고현동약안이 만들어집니다. 여기서 동(洞)은 마을을 의미하는데 500년간 한 마을에서 시행된 이들 마을공동체의 약속을 총칭하여 「태인고현동향약」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현재 남아있는「태인고현동향약」 29권의 문헌들은 1993년 국가보물로 지정되었고, 예전 고현동의 일부인 지금의 남전(藍田)마을 동각(洞閣)에 보관되어 오다가 현재는 정읍시립박물관으로 옮겨 보존되고 있습니다.

불우헌 정극인선생이 고현동에서 향약을 시행한 목적은 마을의 인재양성과 풍속 교화를 통해 마을이 친목하고, 충신과 효자가 넘쳐나는 이상사회의 실현이었다는 것이 태인고현동중향음서(泰仁 古縣洞中 鄕飮序)에 고스란히 담겨있습니다. 마을사람들은 오백년간 향약 내용을 시대상황에 맞게 수정했지만, 정극인선생의 이 서문만은 모든 향약의 맨 첫 장에 한 글자 한 글자씩 정성스럽게 옮겨 담았습니다. 그 출발에 담긴 뜻을 영원히 기억하고자 했던 것으로, 정기적인 마을 모임이 있을 때는 소리내어 읽기도 했습니다.

500년간 지속된 마을의 향약을 대략 살피다 보면 몇 가지 눈여겨볼 점이 있습니다. 첫째는 마을 아이들의 교육과 인재양성을 시종일관 중요하게 여겼다는 점입니다. 괜찮은 선비들이 낙향하여 마을에 안착하고, 이들은 시대에 따라 양사재(養士齋), 남학당(南學堂), 동학당(洞學堂), 동각(洞閣) 등으로 불리는 마을 학당에서 아이들을 가르쳤습니다. 1839에서 1844년까지 연이은 대홍수로 마을이 침수되고, 학당이 심각하게 훼손되었을 때도 가장 먼저 새로 마을 학당을 세우는 노력을 했던 점이 향약에 적혀있습니다.

둘째는 사람들이 마을 역사에 이름이 남는 만큼 부끄러움을 알고 양심에 따라 스스로 미풍양속을 지켜나가도록 유도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과거에 작성했던 향약은 계속 보존했습니다. 또한 그 세부내용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표준적 향약에 비해 의외로 간략히 적었습니다. 흔히 지켜야 할 내용이 구체적이고 세부적이면 더 잘 지켜질거라 생각하지만, 결국 양심과 부끄러움에 의지한 실천만 못한 것이 역사의 교훈이었던 까닭입니다.

대통령 선거가 끝났습니다. 6월에는 자치단체 선거도 있습니다. 임기가 짧다 보니 성급한 목표를 세우고, 의욕이 앞서 법규만으로 사회를 바꾸려고도 합니다. 지속가능한 국가발전의 근간이 되는 지역간 균형있는 인재양성은 등한시하고, 일시적 예산만으로 시설과 산업의 겉모습을 바꾸려고도 합니다.

500년간 마을이 간직해 온「태인고현동향약」은 지금도 말하고 있습니다. 지속가능한 국가발전을 위해서는 강제력을 갖춘 복잡한 법규가 아니라 역사에 대한 성찰과 함께 사회 구성원이 부끄러움을 알도록 하는 것이며, 지역간의 균형 잡힌 교육과 인재양성에 있다고 말입니다.

최재용 <정읍시 부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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