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소(小小)한 찻잔에서 행복을 줍다
소소(小小)한 찻잔에서 행복을 줍다
  • 이소애 시인/문학평론가
  • 승인 2022.02.23 15: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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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소애 시인/문학평론가
이소애 시인/문학평론가

코발트블루에 매료되어 라운드 머그잔을 구매했다. 손으로 만든 찻잔이다. 수탉 네 마리를 파랑 선으로 그린 무늬가 있어서 더욱 마음이 쏠렸다. 동틀 무렵 우렁찬 수탉 울음소리가 흐릿한 나를 깨울 것 같았다. 찻잔은 소리를 품고 있었다. 파랑은 그냥 보고 느끼고 생각나는 대로 행동하는 조르바가 다가와서 자유가 경직된 마음의 열쇠를 열어주었다. (『그리스인 조르바』, 니코스 카잔차키스 지음) 조르바는 바다 크레타섬의 ‘스타브로스’ 해변으로 나를 끌고 갔다. 동로마제국 시절부터 유래했다는 그리스의 전통춤인 ‘시르타키’를 추고 있을 조르바가 찻잔에서 일렁이고 있었다. 파랑은 삶에 지친 고통의 부대낌을 지우개로 지우듯 변신시키는 마력이 있었다.

탈출하고 싶은 유혹이 명절 후 너울성 파도처럼 덮치고 있을 때, 소소한 찻잔은 행복을 보여주었다. 행복은 날개를 달고 새싹처럼 움틀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 파랑 머그잔을 두 손으로 만지작거렸다.

찻잔은 따뜻한 차를 마시도록 몸을 달구고 있었다. 머그잔이 입술에 닿는 순간 내 입술은 부드러운 체온을 느꼈다. 살며시 찻잔에 감도는 온기. 따뜻한 차가 내 몸을 감도는 찰나 행복은 햇볕 사이로 얼굴을 내밀고 있었다.

작열하는 나의 생명은 순수해서 어제 일어난 일을 잊으려고 한다. 내게 중요한 것은 이 순간 찻잔의 미동으로 다가오는 소리에 나를 맡기는 행복을 경험하는 것이다.

차를 마시는 시간은 정지된 시간이다. 코발트블루 찻잔에 띄운 녹차가 제 몸의 색으로 물들여 가는 동안 내 생각은 두려움과 불안감 또는 쓸쓸하고 깊은 슬픔에서 정지된다. 오직 현재 순간 나의 존재를 의식하고 있을 뿐이다.

1초에 90번의 날갯짓을 하는 벌새처럼 눈만 깜박이면 된다. 움직일 수 있는 행동은 “살아 있다”라고 소리칠 수 있는 신호이다. 그러나 정지된 순간은 움직일 수 없으니 자체에서 소리 없는 강자로 변신하는 식물처럼 내가 변신한다.

청화백자를 생각한다. 청색 물감을 사용해 매화나무에 한 쌍의 새가 앉아 있는 모습이 보인다. 국립중앙박물관에서 보았던 옛 기억이 떠올라 조선 전기의 백자항아리를 인터넷으로 찾아 찻잔에 띄워보았다. 찻잎은 기온차도 심하고 스트레스를 받아야 차 맛이 좋다던데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맛이 부드럽다.

정지된 시간의 내 생각은 자유다. 『커피 한 잔의 명상으로 10억을 번 사람들』(오시마 준이치 지음)에서 희망을 시각화하라고 한다. 이는 잠재의식에 소망을 심어 넣기 위해서는 소망을 그림으로 만들어 가슴에 심는 것이 효과적이라고 한다. 찻잔에 희망을 띄워 눈으로 기억해 보는 명상도 해보았다.

찻잔에서 차가 점점 줄어드는 사이 풍금 소리 들리는 바다와, 몽돌이 파도를 만드는 바다와, 자칫 너울성 파도가 파랑을 찢어버리는 성난 바다가 찻잔의 작은 무늬 파문이었다.

사모바르는 18세기 러시아 귀족 가정에서 차를 마시기 위해 물을 끓이기 위하여 사용하는 주전자이다. 러시아인만의 독특한 차 문화는 상류사회의 차별화를 인식시키는 수단이었다. 서민은 양은 주전자에 옛 추억을 담아 물을 끓인다. 코발트블루 찻잔에서 살짝 넘실거릴 따뜻한 물은 자유를 갈망하는 사람에게 행복의 색을 보여 줄 것이다.

어른으로 산다는 건 다양한 상실을 받아들이는 과정이기 때문에 항상 마음에 상처가 있다. 늙어간다는 것은 꿈과 건강과 사랑하는 이까지 차곡차곡 상실이 싸여가는 과정이기에 자유인이 되어보는 꿈은 상상으로만 초대한다.

“나의 쾌락은 사과 한 알에서 찾는 티스푼 두 개쯤의 분량. 나의 행복은 소유가 아니라 경험. 옥수수가 자라는 것. 화초 잎에 빗방울이 떨어지는 소리. 가을 산책로에서 내 머리통을 때리는 도토리.” 이충걸 작가의 글이다. 작가는 소유하려고 욕심부렸던 행복을 부끄럽게 만들었다.

차를 마시는 동안 크레타섬 해변의 파도 소리를 색으로 즐겨보았다. 파랑으로 차곡차곡 쟁여 놓았던 언어들이 시로 변신하기 위해 봄을 기다린다. 잊혔던 기억으로 더듬더듬 행복을 느껴본 정지된 시간이었다.

이소애<시인/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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