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진보적 세력의 출현을 기다리며
새로운 진보적 세력의 출현을 기다리며
  • 채수찬 경제학자/카이스트 교수
  • 승인 2022.02.09 1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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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수찬 경제학자/카이스트 교수
채수찬 경제학자/카이스트 교수

「보수는 부패로 망하고 진보는 분열로 망한다」는 말이 있다. 그런데 요즘은 이 말이 잘 맞지 않는 것 같다. 오히려 거꾸로 된 것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한다. 진보진영에서 부패사범이라고 볼 수 있는 스캔들이 터져 나오고 있지만 내부 비판은 드물고 서로 입을 맞춰 옹호하고 있다. 보수진영은 서로 시끄럽게 공격하며 세력을 하나로 모으지 못하고 있다. 진보는 부패하고 보수는 분열된 모습이 보인다.

사전적 의미로 보면, 보수는 기득권을 지키려는 세력이다. 자기들이 가진 것을 기를 쓰고 지키려고 한다. 그러다 보면 점점 부패해질 수밖에 없고, 이익을 공유하는 사람들끼리 서로 감싸고 뭉치는 쪽으로 가게 된다. 역시 사전적 의미로 보면, 진보는 보수의 기득권을 해체하여 나누고 사회의 주도권을 새롭게 세우려는 세력이다. 기득권을 깨부수는 방법도 여러가지고, 기득권을 깨부수고자 하는 세력도 여러갈래다 보니, 분열된 모습이 보이기 마련이다.

한국의 근세사를 보면 해방 후에는 좌우의 대립이 있어, 크게 보면 당시 우익이 보수이고 좌익이 진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남북분단 이후 상황이 달라졌다. 산업화 초기에는 산업화세력이 사회의 변화를 주도한다는 측면에서 진보적이었다. 농업에서 공업으로 주된 산업이 이동하면서, 공업기반의 신흥자본가들이 생겨났고 이들의 이익을 지키고 확대하는 정치구조가 만들어졌다. 경제성장과 함께 부와 권력이 집중되면서 이들은 보수화되었고 구조적인 부패가 있었다. 이 체제를 깨부수려는 사람들이 큰 흐름을 형성하여 민주화 세력이 되었고, 많은 사람들의 희생을 바탕으로 결국은 민주화가 성공했다. 이 단계에서는 당연히 민주화세력이 진보적 세력이었다.

민주화 이후에는 산업화세력과 민주화세력이 서로 각축하면서 정권도 양대세력이 교대로 가져갔다. 이 과정에서 오래전부터 보수화된 산업화세력뿐만 아니라 어느 시점까지 진보적이었던 민주화세력도 보수화되었다. 권력에는 그에 따른 이익이 생기기 마련이어서 민주화세력도 기득권을 갖게 되고 이를 유지하려는 과정에서 부패도 생겨났다. 물론 사회전체가 이전보다 많이 투명해진 상황이라서 구조적인 부패로 발전하지는 않았다.

단순화해서 말하자면, 한국정치의 양대축인 기존의 산업화세력과 기존의 민주화세력은 둘다 기득권 지키기에 매달리는 보수적인 세력이 되었다. 한국정치는 새로운 진보적인 세력의 출현을 기다리고 있다. 필자는 새로운 흐름이 일단 지식기반 산업으로의 변화를 주도하는 사람들을 중심으로 형성될 가능성이 있고 또 그렇게 되는 게 바람직하다고 본다. 이들이 성공하면 지식산업화에 따르는 사회문제들을 해결하려는 사람들을 중심으로 또 하나의 흐름이 형성될 것이다. 먼저 신산업화세력이 출현하고 다음으로 신민주화세력이 출현할 것이라는 게 필자의 기대 섞인 전망이다.

아직까지 인류가 실행하고 경험한 정치체제 중 상대적으로 가장 나은 체제는 민주주의다. 경제체제 중에서 상대적으로 가장 나은 체제는 시장경제다. 한국은 제이차세계대전 이후 짧은 시간 안에 둘다 성취하였다. 이제 다른 나라를 따라가기만 하는 게 아니라 앞서서 가야 하는 위치에 와있다.

한 사회나 국가가 항상 앞으로만 가는 것은 아니다. 정체하기도 하고 뒤로 가기도 한다. 한국이 그렇게 되지 말란 법도 없다. 이 시점에서 자만하면 실제로 그렇게 될 것이다. 한국의 산업화와 민주화는 많은 사람들의 피와 땀으로 이루어졌다. 이를 이어받은 사람들이 다음 세대를 위한 희생은커녕 자신들의 기득권 지키기에 급급하고 있지는 않은지.

다음 세대에게 필요한 자산을 만들어 남겨줄 수 있는 새로운 진보적인 세력이 등장하길 고대한다.

채수찬<경제학자/카이스트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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