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운 최치원 선생이 쓰신「계원필경」이라는 문집이 있습니다. 학창시절 역사교과서에서 이름을 들어봤던 책입니다. 고운 최치원 선생이 당나라 유학시절, 황소의 난을 물리치는데 공헌을 했던 당나라 장수 고변의 참모로 일을 하게 되는데 이 시기(880~884)에 지은 작품 일부를 정리한 문집이라고 합니다. ‘네가 비록 숨은 붙어 있다고 하지만, 넋은 이미 빠졌을 것이다’로 정점을 찍은 ‘토황소격문’이 여기에 실려있습니다.
「계원필경」은 그 내용이 온전히 남아 오늘날까지 전해지는 우리나라의 가장 오래된 책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18세기 연암 박지원(1737~1805)은 「계원필경」이 이미 없어진 지 오래된 모양이라고 열하일기에 썼을 정도이니, 200년 전 당시에 남겨진 책이 거의 없었다는 걸 짐작할 수 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전문가들의 의견에 따르면 고운이 고려, 조선시대를 지나오며 추앙만 받은 것은 아니라고 합니다. 성리학이 조선의 통치이념으로 자리 잡고, 유일한 가치 척도가 되면서 고운을 대하는 기류가 바뀌기 시작한 것입니다. 퇴계 이황선생(1501~1570)도 고운에 대해 불교에 아첨한 인물이라고 혹평하며 성균관이나 향교의 문묘 배향에도 부정적 입장을 보입니다. 고운 최치원은 유학자였지만, 유교뿐 아니라 불교, 도교를 주체적이고 통합적으로 받아들였던 까닭입니다. 아마도 이런 조선의 완고한 학문적 분위기 속에서 고운의 문집 「계원필경」은 드러내놓고 간행되거나 필사되기가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조선 후기에 실학사상이 생겨나고, 오랑캐로 여겨지던 청의 발달한 문물을 수용하여 조선을 발전시키자는 박지원, 박제가, 서유구 등 북학파 학자들이 생겨나면서 고운 최치원은 다시 새롭게 조명되기 시작합니다.
젊었을 때 순창군수를 지내고, 전라관찰사로 있던 서유구(1764~1845)는 전라도를 순시하면서 무성서원과 피향정 등 정읍지역인 옛 태산의 군수(890~893)를 지낸 최치원의 흔적을 살폈는데 이때 고운 최치원에 대한 지역 사람들의 흠모와 존경심이 인상 깊었다고 합니다. 1834년에 좌의정(홍석우)으로부터 우연히 「계원필경」진본을 받은 서유구는 사재를 들여 100부를 동활자로 조판 인쇄합니다. 그리고 ‘무성서원’과 해인사에 나누어 보관하게 합니다.
서유구가 다른 곳이 아닌 무성서원에 「계원필경」을 보관시켰던 연유는 무엇일까요? 아마도 태산군수였던 고운 최치원을 아껴주고, 그의 책을 지켜줄 수 있는 곳이 정읍 무성서원이라고 믿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우리는 이 부분에서 정읍 지역의 학풍이 일찍부터 현실적이고 개방적이었다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실제로 무성서원뿐 아니라 전라도의 대학자 일재 이항(1499~1576)과 그의 제자로 임진왜란 2차 진주성 전투시 성내 백성과 끝까지 함께 한 의병장 김천일을 배향하는〈남고서원〉, 문신 관료로서 웅치전투에 참여했던 일재의 또 다른 제자 오봉 김제민을 배향하는〈도계서원〉등 정읍의 다른 서원을 살피다 보면 더 확연히 알게 됩니다.
끝으로 고운 최치원 선생이 어디에서 태어나셨는지에 대해서도 여러 학설이 있습니다. 그래도 1834년 서유구가 「계원필경」 발간 서문에 적은 대로 ‘바다 밖 한 귀퉁이의 조그마한 지방’으로도 표현된 옥구(지금의 군산)가 아닐까 생각됩니다.
하지만 어디서 태어났는지보다 더 중요한 것은 어디서 어떤 일을 했는지, 지역이 그 사람을 얼마나 아끼고 사랑했는지가 더 중요하지 않을까요? 그런 측면에서 고운(孤雲) 최치원 선생을 품은 정읍은 실용사상의 선구안을 지닌 역동적인 지역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최재용<정읍시 부시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