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읍이 사랑한 고운(孤雲) 최치원
정읍이 사랑한 고운(孤雲) 최치원
  • 최재용 정읍시 부시장
  • 승인 2022.02.09 14:33
  • 댓글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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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재용 정읍시 부시장

 고운 최치원 선생이 쓰신「계원필경」이라는 문집이 있습니다. 학창시절 역사교과서에서 이름을 들어봤던 책입니다. 고운 최치원 선생이 당나라 유학시절, 황소의 난을 물리치는데 공헌을 했던 당나라 장수 고변의 참모로 일을 하게 되는데 이 시기(880~884)에 지은 작품 일부를 정리한 문집이라고 합니다. ‘네가 비록 숨은 붙어 있다고 하지만, 넋은 이미 빠졌을 것이다’로 정점을 찍은 ‘토황소격문’이 여기에 실려있습니다.

 「계원필경」은 그 내용이 온전히 남아 오늘날까지 전해지는 우리나라의 가장 오래된 책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18세기 연암 박지원(1737~1805)은 「계원필경」이 이미 없어진 지 오래된 모양이라고 열하일기에 썼을 정도이니, 200년 전 당시에 남겨진 책이 거의 없었다는 걸 짐작할 수 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전문가들의 의견에 따르면 고운이 고려, 조선시대를 지나오며 추앙만 받은 것은 아니라고 합니다. 성리학이 조선의 통치이념으로 자리 잡고, 유일한 가치 척도가 되면서 고운을 대하는 기류가 바뀌기 시작한 것입니다. 퇴계 이황선생(1501~1570)도 고운에 대해 불교에 아첨한 인물이라고 혹평하며 성균관이나 향교의 문묘 배향에도 부정적 입장을 보입니다. 고운 최치원은 유학자였지만, 유교뿐 아니라 불교, 도교를 주체적이고 통합적으로 받아들였던 까닭입니다. 아마도 이런 조선의 완고한 학문적 분위기 속에서 고운의 문집 「계원필경」은 드러내놓고 간행되거나 필사되기가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조선 후기에 실학사상이 생겨나고, 오랑캐로 여겨지던 청의 발달한 문물을 수용하여 조선을 발전시키자는 박지원, 박제가, 서유구 등 북학파 학자들이 생겨나면서 고운 최치원은 다시 새롭게 조명되기 시작합니다.

 젊었을 때 순창군수를 지내고, 전라관찰사로 있던 서유구(1764~1845)는 전라도를 순시하면서 무성서원과 피향정 등 정읍지역인 옛 태산의 군수(890~893)를 지낸 최치원의 흔적을 살폈는데 이때 고운 최치원에 대한 지역 사람들의 흠모와 존경심이 인상 깊었다고 합니다. 1834년에 좌의정(홍석우)으로부터 우연히 「계원필경」진본을 받은 서유구는 사재를 들여 100부를 동활자로 조판 인쇄합니다. 그리고 ‘무성서원’과 해인사에 나누어 보관하게 합니다.

 서유구가 다른 곳이 아닌 무성서원에 「계원필경」을 보관시켰던 연유는 무엇일까요? 아마도 태산군수였던 고운 최치원을 아껴주고, 그의 책을 지켜줄 수 있는 곳이 정읍 무성서원이라고 믿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우리는 이 부분에서 정읍 지역의 학풍이 일찍부터 현실적이고 개방적이었다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실제로 무성서원뿐 아니라 전라도의 대학자 일재 이항(1499~1576)과 그의 제자로 임진왜란 2차 진주성 전투시 성내 백성과 끝까지 함께 한 의병장 김천일을 배향하는〈남고서원〉, 문신 관료로서 웅치전투에 참여했던 일재의 또 다른 제자 오봉 김제민을 배향하는〈도계서원〉등 정읍의 다른 서원을 살피다 보면 더 확연히 알게 됩니다.

 끝으로 고운 최치원 선생이 어디에서 태어나셨는지에 대해서도 여러 학설이 있습니다. 그래도 1834년 서유구가 「계원필경」 발간 서문에 적은 대로 ‘바다 밖 한 귀퉁이의 조그마한 지방’으로도 표현된 옥구(지금의 군산)가 아닐까 생각됩니다.

 하지만 어디서 태어났는지보다 더 중요한 것은 어디서 어떤 일을 했는지, 지역이 그 사람을 얼마나 아끼고 사랑했는지가 더 중요하지 않을까요? 그런 측면에서 고운(孤雲) 최치원 선생을 품은 정읍은 실용사상의 선구안을 지닌 역동적인 지역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최재용<정읍시 부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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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진한 2022-02-09 21:02:58
일본 항복후, 현재는 5,000만 유교도의 여러 단체가 있는데 최고 교육기구는 성균관대이며,문중별 종친회가 있고, 성균관도 석전대제로 유교의 부분집합중 하나임.
윤진한 2022-02-09 21:02:05
수신의 도 불교라고 가르침. 고려시대는 유교 최고대학 국자감을 중심으로, 고구려 태학, 백제 오경박사, 통일신라 국학의 유교교육을 실시함. 유교사관 삼국사기가 정사(正史)이던 나라.
http://blog.daum.net/macmaca/3057

@무속은 은.주시대 始原유교의 하늘숭배,산천숭배,조상숭배, 주역(점)등에서 파생된 始原유교의 지류.
역사적 순서로 보면 황하문명에서 은.주시대의 시원유교[始原유교:공자님 이전 하느님(天)과 여러 神明을 숭배]에서, 한국 고조선의 기자조선으로 始原유교유입, 기자조선(始原유교) 마지막왕 기준의 후손이 삼한건설, 삼한(始原유교)의 영토에서 백제(마한).가야(변한).신라(진한)가 성립됨.
@한국 유교 최고 제사장은 고종황제 후손인 황사손(이 원)임. 불교 Monkey 일본
윤진한 2022-02-09 21:01:08
외래종교 형태로 단순 포교되어, 줄곧 정규교육기관도 없이, 주변부 일부 신앙으로 이어지며 유교 밑에서 도교.불교가 혼합되어 이어짐. 단군신화는 고려 후기 중 일연이 국가에서 편찬한 정사인 삼국사기(유교사관)를 모방하여, 개인적으로 불교설화 형식으로 창작한 야사라는게 정설입니다.

유교,공자.은,주시대始原유교때 하느님.조상신숭배.세계사로보면 한나라때 공자님도제사,동아시아(중국,한국,베트남,몽고지역)에 세계종교 유교성립,수천년전승.한국은殷후손 기자조선 기준왕의 서씨,한씨사용,三韓유교祭天의식. 국사에서 고려는 치국의道유교,수신의道불교.

세계사로 보면 한나라때 동아시아 지역(중국,한국,베트남,몽고지역)에 세계종교 유교가 성립되어 지금까지 전승. 이와 함께 한국 유교도 살펴봄.

한국 국사는 고려는 치국의 도 유교
윤진한 2022-02-09 21:00:13
이런 전통적인 신명 섬기기에 대해서, 공자님도 오래된 관습으로, 논어 "향당(鄕黨)"편에서, 관습을 존중하는 예를 표하셨습니다. 신명(神明:천지의 신령)모시기 전통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조상을 섬기는 제사는 유교가 공식적이고, 유교 경전에 그 절차와 예법이 서술되어 있습니다. 유교경전 예기에는 상고시대 조상신의 위치에서 그 혼이 하늘로 승천하시어 인간을 창조하신 최고신이신 하느님[天(하느님, 하늘(하느님)]하위신의 형태로 계절을 주관하시는 五帝가 계십니다. 유교는 하느님(天), 五帝, 地神, 山川神, 부엌신(火관련)숭배등 수천년 다신교 전통이 있어왔습니다.

@한국은 세계사의 정설로,한나라때 동아시아(중국,한국,베트남,몽고)에 성립된 세계종교 유교국으로 수천년 이어진 나라임. 불교는 고구려 소수림왕때 외
윤진한 2022-02-09 20:59:24
@동아시아는 수천년 유교사회입니다. 공자님 이전의 始原유교는 기독교에서 말하는 예수님 이전의 구약성서 시대에 해당됩니다. 하느님(天).神明,조상신 숭배가 유교의 큰 뿌리입니다. 유교는 국교로, 주변부 사상으로는 도가나, 음양가, 묵가사상등이 형성되었고, 법가사상은 이와는 다른 현실적인 사상이며, 국가의 통치에 필요한 방법이었습니다(진나라때 강성하고, 유교나 도교와 달리, 한나라때 율령이 반포되어 이후 동아시아에 유교와 별도의 성격으로 국가통치에 활용됨).@일부 지역에서 굿이나 푸닥거리라는 명칭으로 신령숭배 전통이 나타나도, 이를 무속신앙이라 하지는 마십시오. 불교라고도 하지 마십시오. 유교 경전 논어 팔일(八佾)에서는 공자님이전부터 섬겨온 아랫목 신(안방신), 부엌신등을 섬기는 전통도 수록하고 있습니다. 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