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을 소환하는 아픈 기억들
추억을 소환하는 아픈 기억들
  • 이소애 시인/문학평론가
  • 승인 2021.12.19 1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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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소애 시인/문학평론가
이소애 시인/문학평론가

내가 나인 이유는 뇌가 나를 기억하기 때문이다. 뇌는 나의 생존을 위하여 슬픔과 분노를 조절하며 의사 결정을 한다. 내 삶의 이익을 위하여 빠른 셈법으로 선택권을 가진다. 가끔 내 마음과 정신은 어디에서 오는 건지 의문이 생긴다. 코로나19 공포 속에서 2021년을 용케도 버티어 온 마지막 달력이 누렇게 변색한 색의 변화를 본다. 365개의 숫자에서 콕 찍어내는 기억이 실타래처럼 풀려 나온다. 기억은 공포와 고통을 즐겨 저장하는 습관이 있다.

기억을 색연필로 밑줄을 그을 때는 1천억 개 되는 신경세포가 서로 연결되어야 저장된다고 한다. 대부분 아픈 기억들이다. 가끔 뇌의 오작동으로 엉뚱한 말과 행동을 지시할 때가 많아진다. 이럴 땐 베란다에 있는 로즈마리 곁으로 다가가서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향기가 퍼지도록 어루만져 본다.

지나간 달력을 들춰보면서 한 해를 더듬어보았다. 스마트폰이나 이메일로 받은 문자를 다시 꼼꼼하게 읽으면서 나에게 활력을 준 언어를 찾아보았다. 문자 수신 후 하루를 즐겁게 보냈던 기쁨을 떠올리면서 저장된 글을 열어 보았다.

‘사랑합니다’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예뻐요’ ‘아름답습니다’ ‘힘내세요’ 중 ‘아름답습니다’라는 문자를 받았을 때가 가장 나의 뇌 기능은 활발하게 작동했던 것 같다. 나는 누구에게 ‘아름답다’라고 말한 적이 있었던가.

타인에게 기쁨을 주는 말을 하는 사람이 되려면 많은 시간을 투자해서 연습해야 한다. 마음이 신의 경지까지 도달해야 용서가 자유롭다. 칭찬과 격려로 우울증에 시달리는 사람에게 새로운 활력을 준다면 세상은 얼마나 밝아질까.

서울대학교 주병기 교수는 KBS “코로나19 이후, 대한민국 길을 묻다” 강연에서 무너지는 중산층, 코로나19로 더 극심해진 양극화 현상이 나타난다고 한다. 세계에서 가장 빠르게 불평등해지는 우리나라는 근로소득 격차와 빈곤율이 OECD 중 최상위권이며, 산업재해 1위 국가라고 말한다. 이는 부동산 가격 상승이 가져온 자산 불평등에서 발생하는 것이라고 한다.

양극화와 불평등을 이겨낼 새로운 세상이 가능하다는 사실에 공감하고 함께 길을 찾는 지혜가 필요하다고 했다. 이를 실천할 수 있는 지도자가 이 나라를 이끌었으면 한다. 코로나19보다 더 공포감을 주는 양극화 사회가 될까 두렵다.

초등학교 시절인가 보다. 전주천 매곡교 아래에서 서커스 공연을 하기 위하여 천막을 친다. 천막 앞자락에서 펄럭이는 깃발처럼 가슴이 뛰었다. 나팔 불고 북소리가 요란하면 공연이 곧 시작한다는 신호였다. 통옷을 입고 뒤뚱뒤뚱 걸으며 빨간 고무 코와 두 볼에 빨간 점을 그린 피에로가 날 기억하고 있을 서커스였다. 원뿔 모자를 쓰고 하얗게 분칠한 피에로가 보고 싶어 책가방은 내동댕이치고 달려갔었다.

서커스 막간에 나와 우습고 재미있는 행동을 하는 어릿광대를 보고 있노라면 어머니의 무서운 얼굴은 싹 사라지기도 했다. 그렇게 뛰고 놀고 공부하며 학창 시절을 보냈어도 가난을 부끄러워하거나 빈부의 격차나 불평등은 모르고 살아왔다.

“가난은 부족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더 많이 갖기를 원하는 데서 온다. 금이 아름다운 것을 알게 되면 별이 아름답다는 것을 잊어버린다.” 『내 인생에 용기가 되어준 한마디』에서 정호승 시인이 말한다.

그렇다. 한 편의 시가 원고지에서 광채가 날 때 그 기쁨은 세상을 다 얻은 것 같지 않았던가. 시장이나 집을 돌아다니면서 노래를 부르거나 북을 치면서 돈을 얻으러 다니는 사람, 풍각쟁이와 다름없는 가난한 시인의 삶에서 행복을 느끼며 산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면 그 시간이 황금처럼 화려하지 않았던가.

2021년 마지막 달력을 보면서 이미 뜯긴 11장의 달력 속 추억을 소환해 보는 일도 소중하다. 자기 결정권을 진두지휘하는 ‘뇌’의 눈치를 보면서 살금살금 살기 위한 처방이다. 내 생각만으로 로봇이 움직이는 세상에서 살아야 할 2022년을 기다린다.

나의 상상만으로 움직이는 사회에 존재하기 위하여 인간의 생각이 얼마나 소중한 삶을 이끌어 갈 것인가를 계획해 본다. 왜냐하면 아픈 기억만이 나를 이끌고 가기 때문이다.

이소애 <시인/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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